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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Nov 30. 2023

그 해 우리는

좁은 방안에 남녀의 신음 소리가 울린다


 "영택아... 저것 좀 끄면 안 되겠니? 아주 '동물의 왕국'이다."

 "아! 누나, 깜빡했어요. 죄송해요;;;"




 대학교 1학년 2학기, 나는 교내 영상제작업체에서 알바를 하게 됐다.


 "앞으로 모르는 거 있으면 이분이 잘 알려줄 거야." 처음 봤던 30대 후반의 남자가, 컴퓨터 앞에서 뭔가에 열심이던 여자에게 나를 맡겼다.

 "잘 부탁드립니다..."

 "응, 잘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하던 일에 복귀한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녹색 체크 남방을 입고 있었고, 긴 생머리에, 얼굴이 작고, 하얗고, 키가 크고, 마르고... 예뻤다. 그런데 말이 없었다. 찬 바람까진 불지 않았지만,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네 일은 거의 인코딩인데, 하는 법은 선아 씨가 알려줄 거야."

아. 저분 이름이 선아구나. 남자가 돌아간 후 선아라는 분이 말했다.

  "인코딩 해봤어?"

  "아니요..."

  "...뭔지는 아니?"

  "아니요..."

  "...괜찮아. 알려줄게. 내가 스물다섯이니까 누나라고 불러."


 그렇게 '누나'가 된 선아 씨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 웃지도 않았다 - 친절하고 천천히 '인코딩'이란 걸 알려줬다. 그건 그냥 동영상 캡처였다. 테이프나 CD에 있는 영상들을 컴퓨터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영상 잘 나오나 체크하고, 잘 나오면 컴퓨터 캡처 시작 버튼 누르고, 영상 끝날 때까지 대기하다가, 끝나면 캡처 중지 버튼 누르고, 파일로 잘 만들어졌는지 체크하면 끝이었다. 와... 이거 꿀이네.


 "근데" 선아 누나가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거 다 해야 돼."

 "..!!!"

 그곳엔 박스 몇 개가 쌓여 있었고, 박스 하나에는 CD가 틈도 없이 빼곡했다.

개중엔 일반적인 영화도 몇 개 있었지만


"다 야동이야."

 선아 누나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다 하려면 하루에 다섯 개씩은 해야 돼. 공강 땐 네가 하고, 너 수업 가면 내가 걸게"

 "아...네..."

그렇게 1학년 2학기, 야동 캡처 대장정이 시작됐다.




 회사는 대표 1명, 남자 PD 1명, 남자 촬영감독 1명, 편집 PD인 선아 누나와 세희라는 작가 누나로 굴러갔다. 직접 영상을 만들고 납품하는 일과 영상 판권을 사서 필요로 하는 곳에 공급하는 일로 먹고사는 것 같았다.


 "야동은 회사가 먹고살기 위해 하는 '필요악'인 거지." 선아 누나가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 '필요악'은 편집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종종 작가인 세희 누나가 놀러 오긴 했지만, 대부분 선아 누나와 나, 두 명만 있었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어서 조용한 편집실엔, 오디오를 꺼놔서 침묵 속에 몸부림치는 야동이 항시 틀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너무 보다 보니, 선아 누나 말대로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해져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되려 신경이 가는 쪽은 선아 누나의 작업이었다. 모니터엔 영상이 나오고, 누나는 그걸 자르고 붙이고 했다.

 "누나는 뭐로 편집하시는 거예요?"

 "이거? 프리미어라고 하는 거야. 컴퓨터로 편집하는 프로그램이야."

프리미어라고. 프리미어.. 프리미어...

 "이거 배우면, 저도 편집할 수 있는 거예요?"

선아 누나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응. 할 수 있지. 근데 하지 마."


 선아 누나는 아직도 기억날 만큼 친절했다. 말은 적고 웃진 않았지만, 눈은 따뜻했고, 언제나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몇 달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깨닫게 됐는데, 천성이었다. 그냥 원래 말과 행동이 일반인의 0.8배속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내게 특별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대학교 입학 후 처음 느낀 호사스러울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실보다 편집실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강의를 쨀 정도였다. 알바 주제에 애교심보다 애사심이 커져 버렸다.

   

 회사에서 에어로빅 영상을 촬영한다고 한 날, 그렇게 또 강의를 쨌다. 답답한 강의실에서 기사 쓰기를 하고 있느니, 진짜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PD님, 저, 도와드릴 일 없을까요?"

"그럼 고맙지! 시간 되니?"

"네!" 밝게 거짓말을 하고, 촬영 장비들을 차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비들은 무겁지만, 이걸로 촬영한다고 생각하니, 대단해 보였다. 철붙이를 아기 다루듯 했다.

 현장에 PD님이 지시하고, 선수님들은 열심히 에어로빅하고, 촬영감독님은 'ENG'라고 하는 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촬영했다. 나는 촬영 장비나 운동 기구 옮기는 잔심부름을 하다 보니 점심때가 됐다. 에어로빅 측에서 준비를 해놓았다고 식당에 갔는데, 상견례하는 한정식집에 온 줄! 단언컨대 20년 밥상 중에 그렇게 많은 반찬은 처음이었다. 에어로빅 측 대표가 말했다.


 "PD님. 차린 게 없는데, 많이 드시고 잘 찍어 주세요."

차린 게 없다니!

 "아휴, 훌륭한데요, 잘 먹겠습니다. 영택아, 너도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네... 네!"

 사무실에선 그냥 아저씨였는데, 이렇게 끗발 날릴 줄이야! PD라는 게 이런 건가!! 하지만 정말 놀랐던 건 며칠 후였다.     




종합편집기


 "누나, 이건 뭐 할 때 쓰는 거예요?" 회사에 온 첫날 홀렸었던, 비행기 조종석 같은 기계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종편기야. CG도 넣고, 자막도 넣고 하는 거야."

매력적이지만, 여기서 일한 후로 그 '종편기'라는 게 쓰이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그렇게 먼지만 쌓여갈 때쯤, PD님이 와서 말했다.

 "선아야, 언제 퇴근하니? 너 퇴근하면 종편기 좀 쓰려고 하는데."

이걸 쓴다고? 종편기를 쓴다고?!

누나가 퇴근하는 8시부터 편집실을 쓰겠다며 돌아서는 PD님을, 나도 모르게 멈춰 세웠다.

 "PD님, 저도 같이 보면 안 될까요?"

 "??? 그래그래. 그럼 저녁 같이 먹을래?"

선아 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퇴근했고, 8시부터 종편 작업이 시작됐다.     

 

 대단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홈쇼핑 영상을 작업했던 것 같은데, PD님의 손놀림은 정확히 떠오른다. 여러 개의 모니터들을 켰고, 수많은 버튼이 깜빡였고,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조정할 때마다 자막들이 날아오고, 화면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고, CG가 발생했다. 이 사람은 저 많은 버튼과 레버들이 각각 뭘 하는지 전부 알고 있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니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눈만 껌뻑이며 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PD님이 물었다.


 "넌 왜 신방과에 왔니?"

"영상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무슨 영상이 만들고 싶은데?"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직 1학년이니까, 계속 생각해 보면 되지 뭐." 이 와중에도 PD님은 손을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 두런두런 PD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해줬다. ENG 카메라를 배울 때, 흔들리지 않으려고, 물 채운 양동이를 양손으로 들고 균형 잡는 훈련까지 했단다. 이거 완전 취권 하는 성룡이 따로 없구나. 이 남자는 충분히 '훌륭한 한정식'을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리스펙을 넘어 경외심까지 느껴지는 밤을 지나, 그렇게 함께 아침을 맞았다.     


 "너 밤샜다며?" 출근한 선아 누나가 물었다.

 "네, 어쩌다 보니까요..."

 "너... 진짜 이상한 애네?" 선아 누나가 웃었다. 누나가 웃는 걸 처음 봤다.




 그날 이후로도 일상이 계속됐다. 달라진 게 있다면 누나의 웃음을 많이 보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날 정말 동생 대하듯 했다. 야동 인코딩할 때, 오디오를 죽이고 유행하는 노래를 틀어놓곤 했는데, 내가 킬링벌스에 안무를 하면 - 낯가려도 친해지면 했다 - 그 조용한 선아 누나가 이어받아 작게 율동을 했다! 알고 보니 정말 웃기고 엉뚱한 누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영! 이거 봐봐~" 누나가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짜잔~" PD님이 종편기에서 한 것처럼, 자막이 날아오고 화면이 번쩍거렸다.

 "와! 이 뭔! 컴으로도 이게 돼요?"

 "응, 애프터이펙트로 한 건데, 프리미어 만든 데서 만든 거야."


 그렇게 누나는, 깊게는 아니지만 혼자서 편집하려면 어떤 걸 배워야 하는지 알려줬다. 프리미어는 어도비라는 회사에서 만든 건데, 어도비는 포토샵이 가장 유명하다. 포토샵은 영상에서도 꽤 자주 쓰이고 기본이 되니까, 포토샵을 먼저 떼면 프리미어 배우는 게 쉬워진다. 그런데 합성이나 CG 같은 건 아직 프리미어로는 힘드니까 애펙에서 하면 되는데, 포토샵, 프리미어를 떼면 애펙 배우기도 쉬워진다. 유튜브도 없었고, 교수고 선배고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2001년 겨울. 이런 고급정보들을 선아 누나에게 얻었다. 그리고 학교에 애정이 없어 1학년 마치면 바로 입대하려고 신청했던, 영장이 나왔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은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연말이었다. 7시 퇴근 후, 선아 누나와 작가인 세희 누나가 꼭 송별회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가 호프집엔 자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누나. 고마워요."

 "아니야. 안 돼. 가만있어 봐." 누나는 마트에 갔다가 뒤에 뭘 숨겨서 나왔다.

 "짠!" 캔맥주다. 우리는 사무실 밑 빈 강의실에 몰래 들어가, 결국 송별회를 했다.


 다른 강의실은 어두웠고, 우리가 있는 강의실은 밝았다. 창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고, 세 명이서 새우깡을 안주 삼아 캔맥주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중에 제대하면 꼭 찾아오라고도 했다. 빈 강의실이라 난방은 안 됐어도, 그날 밤은 따뜻했다. 다들 어렸지만 인생에 대한 얘기들,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들. 내 대학 생활은 어두웠지만, 그 시간, 그 공간만큼은 밝았다.     


 영상 제작이란 건 즐겁고 따뜻하고 끈끈한 것. 누나들과 PD님들과 그때의 기억이 내게, 영상 제작의 첫 경험이 돼버렸다. 그래서 결국 난 멈췄어도 좋을 그 강을 건너버리게 된다.



P.S. 선아 누나! 가명으로 적었지만, 혹시라도 글 보면 아실 거 같아요. 메일 주세요! 꼭 한번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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