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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Nov 30. 2023

슈퍼 샤이

방송하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의외로 샤이한 친구들이 많아요
   

 교수의 말이 등에 꽂혔다. 떨리는 성대를 부여잡고, 뻘겋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겨우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조용했다. 동기지만 친구는 아닌 그들은, 아무도 웃고 떠들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은 짧았지만, 또 길었다.


'와... 이건 좀 쎈데...'


 이 굴욕과 패배감. 하지만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이 빌어먹을 <남자 셋 여자 셋>'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즐거웠던 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1990년대니까 그때는 동네마다 VHS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주말마다 두 편씩, 한 시간 가까이 비디오 가게 안을 홀로 서성대며 영화를 고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건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 의식이었다. 사실 영화 보는 것보다 그 시간이 더 설렜다.

 그리고 -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데 - 부모님은 함께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 영화 보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해 주셨다. 가는 주말이 아쉬워 두세 번씩 돌려보는, 이런 패턴이 고등학교 졸업까지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재밌는 것도, 슬픈 것도, 감동적인 것도 꽤 보게 됐고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지?!'

그런 게 또 쌓이다 보니, 생각이란 것도 스멀스멀 발전했다.


'나도 한 번쯤은 만들어보고 싶다...'

그저 누구나 흔히 드는 생각이었다.


출처 MBC, KBS


 이 와중에 때마침 TV에서는 <청소년 드라마 나>, <남자 셋 여자 셋>, <레디고>, <광끼> 같은 하이틴 드라마들이 줄을 이었다. 하필 또 저런 드라마들마저 챙겨봤는데, 다들 방송반에서, 신방과에서, 광고동아리에서, 연애를 하든 과제를 하든 뭔가를 하는 드라마였다. 가뜩이나 '뭔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내게, 드라마는 환상을 제대로 씌워줬다.


 영상 만드는 일이 뭐라고, 저렇게 눈을 반짝대면서 밤낮없이 애쓰는 꼴이라니... 말도 없고 사회성도 없는 놈이, 저렇게 과제 핑계 대고 밤낮으로 붙어있으니까 연분 나버리네...

... 멋지잖아!


 모쏠은 물론이고 친구라고는 한 명밖에 없던 내게, 드라마는 대안을 줬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모든 걸 쟁취할 수 있는 곳이 여기 있다! <남자 셋 여자 셋> 모두가 신방과를 다니잖아! 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 가야 해. 신방과에!


 그리고 신방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난 1학년 때부터 혼자 발표하는 강의를 모두 철회하고 도피해 버린 학생이 됐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렇다고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친해지지도 못했다. 대학이란 자고로, 다들 머리도 컸으니 술 한잔하면서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정답게 두런두런 나누는 곳이라고, 그게 캠퍼스의 낭만이라고 드라마에서 그랬건만...




'뭔가 잘못됐다.'


 'Y2K 밀레니엄을 뚫고 온 01학번 신입생'이란 이름으로, 대학교 첫 행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이름도 모르는 선배들이 데려간 곳은 ‘등록금 인상 반대’라며 목이 터져라 외치며, 계란도 던져대고, 북 치고 장구 치던 데모 현장이었다. 사회대는 이런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며, 신방과가 왜 사회대에 속하는지 알지도 못했던 내게 다그쳤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데모 현장을 벗어난 곳은, 게임의 광풍이었다.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찍찍찍!' 동기들은 과방이든, 운동장이든, 스탠드든, 여기저기서 쥐를 잡았다. 심지어 술도 안 먹고! 심지어 서너 시간을 '찍찍찍' 거리며 쥐 잡는 게임에 몰두했다. 새마을운동인가. 경악했다. 사람이 어떻게 맨 정신으로 저럴 수 있지. '여기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역시 대학의 꽃은 동아리지. 동아리에 들어가자! 드라마 <광끼>에서 본 '광고동아리'의 열정을 기억하며, 교내 길가에 줄지어 선 동아리 모집 부스를 찾았다. 그런데 나를 안 잡아! 분명 드라마에선 '신입생, 프레시맨'을 잡으려고 서로 혈안이 됐었는데!! 내가 노안이라서 그런가!!!


 "저, 동아리 가입하려고 하는데요."


 이 간단한 말이 쑥스러워, 영상 동아리 부스 앞을 왔다 갔다 너 번을 했다. 팔을 붙잡기는커녕, 말 붙이는 사람마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학구열을 불태우자! 하고 싶은 영상제작을 배우자! 하지만 학교는 주구장창 기사 쓰기만 가르쳤다. 도대체 왠가 했더니 아뿔싸! 이 학교는, 이름은 '신문방송학과'인데 '신문'쪽에 특화된 곳이었다. 교수들도 거의 기자출신이었다. 스튜디오는커녕, 장비라고는 조그만 중고 카메라 두 대뿐 - 그조차 한 대는 고장인데, 쓰는 사람이 없어 수리 안 하고 있다며 - 비싼 돈 내고 들어왔지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잘못 왔다...'     


 내가 원했던 그림은, 문과인 신방과가 아니라 예체능인 연극영화과에 있는 거였구나. 빌어먹을 <남자 셋 여자 셋>. 모두가 바쁘고 활기차 보이는 캠퍼스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쉽고 빠르게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아싸'가 돼버렸다. 이렇게 엿 되는데 드라마가 일조하긴 했지만, 모든 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선택한 내 탓이다. 재수나 반수를 해도, 대학교가 이런 곳이라면 어디를 가도 적응 실패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안 했다. 그렇게 평생을 묶여 있다가 갑자기 풀려버린 코끼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신입생의 1학기가 지나갔다.




 아직 땀이 삐질삐질 나는 가을날,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내 폰이 울렸다. 본인을 '학과 조교'라 했다.

 

 "혹시 교내에 영상제작업체가 있는데, 일해보실 생각 있어요?"

 "네?"

이건 무슨 신종사기인가. 본 적도 없는 조교가 말을 이었다.


 "공강 시간에 가서 일하면 되고요, 강의 끝나면 7시까지 일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가서 얘기 들어볼래요?"

 "아, 네..."

 

 뭐지. 그때 나는, 회사에서 잘렸지만 집에는 알릴 수 없어, 출근하는 척 등산으로 시간을 보내는 중년과 같았다. 집에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혼자 시간을 죽였다. 갑자기 왜 내게 이런 전화가 오는 거지. 조교가 나에 대해 뭘 알고 전화하는 건가... 의아함 뒤로 일단 약속을 잡았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교내 건물 3층, 6시 약속.


 3층에 들어서니 벤처창업보육센터라는 명목으로, 학교가 임대 준 장소에 업체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 반년이 넘도록 몰랐다. 노관심에 둔감한 나를 새삼 느끼며 문을 열었다. 


 사무실은 두 공간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일반적인 사무실이고, 한쪽은 뭔가가 많았는데... 한쪽 구석에 TV에서 보던 어깨에 메는 큰 카메라가 있었다. 그 옆에는 영화에서 봤던 큰 필름을 돌리는 기계가 있었다. 반대쪽 벽면에는 평생 처음 본 크고 작은 테이프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고, 그 끝을 따라가니 비행기 조종석처럼 각종 모니터와 버튼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안녕..하세요."

 "아! 아르바이트 오신 학생인가요? 여기 앉으세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오며 탁자로 안내했다.


 "신방과 학생이라고 했죠? 혹시 영상 쪽 일은 해보셨어요?"

"아, 아니요. 처음입니다."

"아직 1학년이니까. 배워가면 되죠. 혹시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공강 시간이랑 오후 7시까지만 도와주시면 되는 일이고요. 급여는..."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내 눈과 마음이, 그곳의 풍경에 홀려버렸다. 


 "할게요..."

할 말이 더 남아있었던 듯, 남자가 되물었다.

 "네? 괜찮겠어요?"

더 재고 따지고 할 게 없었다.


"네. 하겠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영상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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