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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Feb 15. 2024

빠른 속도감을 내는 방법

리듬의 기술 1.

 우리는 영상 제작을 하며, 빠른 속도감을 내고 싶거나, 강한 충격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 '리듬'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 '리듬'은 '빠르다, 느리다'란 속도감, '강하다, 약하다'란 에너지의 충돌로 이뤄진다. <슬램덩크>는 움직임이 없는 만화책이면서도, '리듬'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 방법을 살펴보기 전,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리듬이 느껴지는가? (출처 : 슬램덩크 25권)

 위 강백호와 송태섭의 콤비 플레이를 보면 리듬이 변한다.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패스하기 전까진 빠르게, 송태섭이 패스하는 순간부터 강백호가 골을 넣기까진 느리게 느껴진다. 모두 정지 화면인데 어떻게 한 거지? 이제부터 만화책을 영상 콘티로 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길이'를 이용하는 방법


 우리 눈이 각 컷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 신경 쓰며 다시 보자.

1번 지면은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패스하기 전이다. 7개의 작은 컷들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2~3번 지면은 송태섭이 패스한 후, 강백호가 골을 넣기까지다. 지면 당 3개의 큰 컷들로 채워져 있다.


 작은 컷을 볼 땐, 우리 눈이 금방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컷 사이즈가 작은 만큼, 우리 눈에 들어오는 정보도 적기 때문이다. 반면, 큰 컷에 우리 눈은 오래 머물러 있다. 큰 사이즈의 컷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영상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빠른 속도감 : 만화에서 컷 사이즈가 작다. = 눈이 짧게 머문다. = 영상에서 컷 길이가 짧다.
느린 속도감 : 만화에서 컷 사이즈가 크다. = 눈이 오래 머문다. = 영상에서 컷 길이가 길다.


 <슬램덩크>는 영상에서 컷 길이를 조정하듯, 컷 사이즈를 조정해 같은 효과를 낸다. 예를 들어 한 지면 당 30초라고 치면, 1번 지면은 30초에 7개 컷, 2~3번 지면은 30초당 각 3개 컷이 들어간 것이다. 컷 길이가 짧을수록 단위시간당 더 많은 컷들로 쪼개진다. 몇 개의 컷으로 쪼개졌는가는 영상에서의 커팅 비율에 해당한다.


'충돌'을 이용하는 방법


 이번엔 컷 자체에 신경 쓰며 다시 보자.

 1번 지면에서,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사인을 보내기 전까진, 우리 눈은 후루룩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다시 말해 속도감이 빠르다. 그러다가 송태섭이 사인을 보내는 순간부터 우리 눈은 브레이크가 걸린다. 무엇이 브레이크를 걸었을까? 사인을 보내기 전까지의 컷들은 최소 2명 이상이 등장하는 비슷한 구도의 그룹 샷이다. 반면 브레이크가 걸리는 송태섭의 사인과 강백호의 반응은 클로즈업이다.


 그룹 샷 대 클로즈업. 컷의 충돌로 우리 눈은 집중하기 시작하며, 이어지는 2번 지면 첫 컷, 송태섭이 패스하는 큰 사이즈의 컷부터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한다. 이후 2~3번 지면에서, 클로즈업 컷을 끼워 넣어 우리 눈의 집중도를 유지해 속도감을 늦춰, 제대로 강백호의 덩크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이는 영상에서 롱 샷과 클로즈업의 쓰임과 같다.


 <슬램덩크>는 '컷 사이즈'를 '길이'로, '컷 속성'을 '충돌'로 활용함으로써, 능수능란하게 '리듬'을 창조한다. 이는 다른 만화책들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모든 만화책은 훌륭한 영상 콘티가 된다.



'빠른 리듬'을 만들려면


 <슬램덩크> 산왕의 속공 장면을 살펴보자. 작가가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산왕의 빠르고 매끄러운 속공 플레이로 좌절한 북산이다. 어떻게 표현했을까?


산왕의 속공. (출처 : 슬램덩크 30권)

1) 1번 지면 첫 컷에서 북산 전 멤버를 큰 컷으로 오래 보여줬다. 이는 멤버들의 결의를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2) 다음 컷부터 2번 지면, 송태섭이 이명헌에게 돌파당하기 전까지, 8개의 작은 컷을 배치했다. 동시에 이 컷들에 많은 대사를 배치했다. 커팅 비율을 높이고, 컷 사이즈를 작게 해 각각의 컷 길이를 짧게 인식시켰으며, 그래서 컷 안에 들어있는 대사 역시 빠른 대사로 인식된다. 대부분의 컷 구도 역시 그룹 샷으로, 각 컷 간 브레이크가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대사를 읽자마자 빠르게 다음 컷으로 시선을 옮긴다. 속도감을 점점 높여가는 것이다. 그러다 이명헌에게 돌파당하기 직전 송태섭의 클로즈업으로 브레이크가 걸린다. 브레이크가 걸린 독자들은 이제야 송태섭의 대사를 자세히 보기 시작하며, 송태섭과 '동일시' 된다. 이명헌에게 돌파당한 다음 컷에서, 송태섭이 느낀 대로 독자들도 허를 찔려 깜놀하게 만들려는 준비다.


3) 이명헌의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송태섭을 제쳐버리는 컷이 붙는다. 송태섭은 고민에서 놀람으로 빠른 감정변화를 보인다. 더불어 이명헌이 돌파하는 컷마저 사이즈가 작아 빠르게 다음 컷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송태섭이 놀란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3번 지면 첫 컷부터 이명헌은 또 중간 과정 없이 어딘가에 패스하고, 그 패스를 신현철이 받는다. 송태섭과 '동일시'된 독자들도 놀란 감정을 추스를 새 없이, 산왕의 행동이 이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시선이다. 이명헌이 패스하는 컷에서 농구공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동시키고, 바로 아래 컷인 신현철이 패스받은 농구공으로 무리 없이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는 이들이 속공이 빠르고, 매끄럽게 이뤄진다고 느끼게 만든다. 농구공이 같은 라인(빨간 화살표 표기)의 바로 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우리 눈은 다음 컷 안에서 농구공을 찾게 되고, 찾는 시간만큼 그들의 속공이 매끄럽지 못하고 덜그럭거린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4) 이어지는 4번 지면에서, 신현철은 덩크로 이어지는 중간 과정 없이 바로 골대에 내리꽂는다. 이를 큰 사이즈 컷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은 산왕의 위력을 길게 느낀다.


5) 5번 지면에서는 북산 멤버 클로즈업 5개의 컷들보다 신현철의 컷 사이즈를 크게 보여준다. 신현철을 북산 각 멤버의 표정을 담은 클로즈업보다 길게 보여줌으로써, 북산 각 멤버의 충격과 동시에 산왕의 위력을 강조했다. 눈여겨볼 것은 1번 지면 첫 컷에서 큰 사이즈의 한 컷으로 등장했던 북산 멤버들이, 5번 지면 마지막에선 각각의 작은 컷들로 커팅됐다는 것이다. 한 팀으로서의 결의가, 산왕의 슈퍼 플레이로 받은 충격에 분열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빠른 리듬을 만들기 위해, 쓰인 방법들은 무엇인가?


컷의 길이를 짧게 하고, 커팅 비율을 높인다.
빠른 움직임, 빠른 대사, 빠른 감정변화를 담는다. 이외 사건 자체를 빠르게 전개할 수도 있고, 영상에선 빠른 카메라 워킹도 사용할 수 있다.
클로즈업 등 충돌 요소를 활용해 템포를 조절한다. 밀당처럼 조였다 풀었다 하면 상대적으로 속도감이 배가된다.(a.k.a. 상대성원리)
움직임의 과정을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 움직임의 시작, 중간, 끝을 모두 보여줘서 시청자가 움직임의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면, 속도감은 느려진다.


 많은 컷, 짧은 길이의 컷, 중간 과정 생략... 이 방법들의 공통된 목적은 빠른 속도감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이 방법들이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할까?


 커팅 비율을 높여 많은 컷들을 보여준다는 건, 시청자에게 새로운 시각 정보를 계속 제공한다는 의미다. 짧은 길이의 컷, 중간 과정 생략을 한다는 건, 시청자가 그 시각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원리는 이렇다. 제공되는 컷의 정보를 모두 파악하지 못하고 컷이 넘어갈 때, 다시 말해 확실하지 않을 때 시청자는 빠른 속도감을 느낀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 추측하게 되고, 추측 속도보다 컷의 변화가 빨라서, 리듬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결과, 이해하려고 머리를 긴장시키며 적극적으로 따라가면서 몰입하게 된다. 이것이 빠른 리듬이 만들어내는 몰입의 원리다.


 그리고 우리는 방법보다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 추측하게 한다.' 이것이 빠른 리듬의 원리다. 예를 들어, 나무늘보의 촬영본이 있다고 치자. 방법만 알아서 무작정 컷 길이를 짧게 하고, 컷을 쪼개 편집한다. 하지만 그래도 빠른 리듬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 나무늘보의 감정 없는 느린 움직임은 시청자가 이해하기 힘들지도 않고, 추측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겠어.'란 욕심이 과해 계속 빠르게만 컷을 넘기면, 시청자는 따라가려고 애쓰다, 흐름을 놓치고 포기한다. 아예 안 보게 되는 것이다. 전달해야 할 중요한 부분에선 시청자가 이해할 시간을 줘야 한다. 컷 길이를 늘이는 방법을 쓰거나, 충돌 요소를 활용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충돌'은 왜 브레이크를 걸리게 할까? 후루룩 보다가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건, 컷을 이해하는 데 갑자기 시간이 걸린다는 거 아닌가?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 추측하게 하면, 빠른 리듬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나? 맞다. '충돌'은 빠른 리듬을 만들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충돌' 요소


 '충돌'은 컷 간에 생기는 시각적인 충격을 말한다. <슬램덩크>는 어떻게 '충돌'을 만들어 냈는지 살펴보자.


충돌! (출처 : 슬램덩크 25권, 26권, 28권, 30권)

 컷은 시각적 정보를 담고 있고, 시각적 정보가 다른 컷들이 붙으면 충격을 일으킨다. 이를 '충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컷들이 '충돌'을 일으킬까? 구소련의 몽타주 이론가인 예이젠시테인은 다음과 같이 '충돌'을 정의했다.


빛, 움직임, 형태, 방향성, 분위기, 숏 사이즈, 초점거리, 대비, 규모, 숏 길이, 속도, 연기, 상징 등 숏에 들어 있는 이들 각 요소들의 차이점을 배치하는 것이 '충돌'이다.
- 예이젠시테인


 다시 말하자면, 숏 사이즈(클로즈업/와이드 숏), 속도(빠르다/느리다), 명암(밝다/어둡다), 운동 방향(좌/우, 위/아래), 형태(크기, 부피, 질량, 깊이의 차이), 분위기(정적/활동) 등의 차이가 있는 컷을 붙여 '충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청자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차이를 연결하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 과정이 바로 몰입이다. <커팅 리듬, 영화 편집의 비밀>이란 책에선 '충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충돌은 관객에게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영화에도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래서 충돌의 스타일을 적용한 시퀀스나 영화는 더욱 역동적이고, 생생하며, 과감하다. (중략) 활기차고 활동적이고 과감한 에너지가 필요하거나 그런 의미를 담아야 하는 액션 장면, 격투 장면, 추격 장면, 뮤직비디오, 광고의 제작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런 충돌 스타일이 사용된다.
- 커팅 리듬, 영화 편집의 비밀|캐런 펄먼 저


 '충돌'은 역동적이고, 생생하며, 과감한 에너지로 '빠른 리듬'을 만들 때도, 브레이크를 걸어 '느린 리듬'을 만들 때도 활용된다. <슬램덩크>는 한 장면 안에서도 여러 '충돌' 요소를 활용한다.


몰입의 기술. (출처 : 슬램덩크 28권)

 원리를 깨우친 만이, 명장면을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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