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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Feb 15. 2024

진짜보다 재밌게 보일 방법

몰입을 위한 행동

 <시나리오 가이드>라는 책에선, 출연자의 움직임을 '활동'과 '행동'으로 구분했다.


활동(activity)이란 등장인물이 어떤 장면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중략) 반면 행동(action)이란 어떤 목적을 가진 활동, 구체적으로 목표에 대한 주인공의 추구를 밀고 나가는 활동을 지칭한다.
- 시나리오 가이드|D.하워드·E.마블리 공저


 그러면서 행동이든 활동이든, 관객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비주얼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


기억이나 체험은 들어서 알게 되었을 때보다 보아서 알게 되었을 때 더 강렬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캐플렛집안과 몬태그집안의 적대감은 결투나 거리에서의 패싸움으로 보여진다. (중략) 만약 이들이 자신의 증오나 열정이나 변화를 그저 대사로 들려줬다면 그 효과는 크게 반감되었을 것이다.
- 시나리오 가이드|D.하워드·E.마블리 공저


 시청자는 대사보다 '보여지는 것'에 강렬함을 느낀다. 강렬해야 시청자는 몰입다.


'몰입'을 위한 행동


 <슬램덩크> 1권에서, 강백호의 목적은 농구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입으로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노동으로 끈기를 입증해 농구부에 들어간 강백호. (출처 : 슬램덩크 1권)


그는 풋내기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언제나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며 (출처 : 슬램덩크 3권, 16권, 22권)


모든 멤버가 목적 달성을 위한 자신의 변화를,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출처 : 슬램덩크 28권, 29권, 30권)


 <슬램덩크> 녀석들은 1권부터 31권까지, 토론이나 논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향한 그들의 열정과 변화를, 훈련이든 경기든, 오로지 행동으로 증명한다. 이로써 독자 강렬히 몰입시킨다.


 영상을 만드는 우리도, 출연자가 뭘 원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촬영본의 바다에서, 원하는 것을 향한 '사건'을 추릴 수 있고, 그 사건 안에서 출연자의 열정과 변화가 담긴 '행동'을 선택해 붙일 수 있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울리는 대사를 붙이는 건 일도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시청자에게 강렬한 몰입 경험을 선사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이입'을 위한 행동 구성


 원하는 것을 향한 출연자의 행동을 선택했다면, '감정이입' 시킬 수 있도록 그 행동을 으로 구성해 보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출연자와의 '동일시'


 시청자가 출연자를 '자기 자신'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이입' 시키는 방법이다. <슬램덩크>가 채치수와 우리를 '동일시' 시킨 방법을 보자.


윤대협이 공을 던졌다. 그리고 (출처 : 슬램덩크 20권)

 1) 채치수는 골대를 바라본다. : 출연자가 '뭔가 보는 행동'을, 시청자가 본다.

 2) 골대에 골이 들어간다. : 출연자가 '본 것'을, 시청자도 본다(시점 숏).

 3) 채치수는 절망한다. : 출연자가 본 것에 '반응하는 행동'을, 시청자가 본다(클로즈업).


 이 패턴이 출연자와의 '동일시' 방법이며, 이 방법엔 두 가지 기술이 사용된다(커팅 리듬, 영화 편집의 비밀|캐런 펄먼 저).


시점 숏 : 말 그대로 등장인물과 같은 시선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것을 함께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클로즈업 : 시청자를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함으로써 더 많은 친근감을 형성시키고, 롱 숏에 비해 감정의 표현도 훨씬 자세하게 드러낸다.


2. 행동과 반응(Act-React)


 모든 이야기는 행동과 반응이다. 작게는 출연자의 행동과 반응 행동, 크게는 사건과 반응 사건으로 구성된다. <슬램덩크>가 행동과 반응을 쌓아나가는 장면을 보자.


산왕전, 서태웅이 마지막 공격을 한다. 그리고 (출처 : 슬램덩크 31권)

 1) 강백호가 프리로 대기 중이다. : 행동(Act)

 2) 서태웅이 강백호를 발견하고 패스한다. : 반응(React)

 3) 강백호가 슛을 날려 성공시킨다. : 행동(Act)

 4) 서태웅이 강백호를 본다. : 반응(React)

 5) 강백호가 서태웅을 본다 : 행동(Act)


 단 한 번의 대화 없이 행동과 반응만을 쌓아 올려 조마조마하게 '감정이입' 시킨 후, 그 끝에


폭발시켜 버렸다. 단 한마디 없이. (출처 : 슬램덩크 31권)



'리얼리티'를 위한 행동


영상 제작에서 리얼(Real)은 '진짜'. 리얼리티(Reality)는 '진짜 같은'이란 의미가 있다. 기록물이나 보도물은 '리얼'이 중요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 반면 교양, 예능 같은 구성물은 '리얼리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아니라 '진짜 같이' 보이게 만는 것이다. 현실을 수정해도 된다는 뜻이고, 시청자몰입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출연자 행동을 반대로 왜곡하거나, 없던 일을 만들어내란 게 아니다. 그건 조작이다. 그렇다면 조작이 아닌 수정은 무엇인가? 시청자에게 현실보다 강렬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나 구성 배치를 바꾸는 수정이다. 이 선을 잘 타는 게 중요하다. <슬램덩크>가 강렬함을 준 방법을 보자.


채치수와 강백호는 이기고 싶다. (출처 : 슬램덩크 14권, 31권)

 <슬램덩크>는 '대사'보다 '행동'으로 말한다. 우리는 위 행동 하나로, 이 친구들이 얼마나 아픈지, 그럼에도 얼마나 이기고픈 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물론 위 행동 대신, 내레이션으로 부상 상태에 관해 설명할 수 있고, 대사로 승리에 대한 열망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한 컷으로도 그보다 효과적으로 표현되는데 굳이? 괜히 구구절절 늘어져, 몇 페이지는 더 써야 할 것이다. 진짜(Real)는 구구절절 대사를 쳤더라도, 다 걷어내고 단번에 표현되는 행동 한 컷으로 바꾸자(Reality). <슬램덩크>가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한 다른 방법을 보자.


황태산에게 패배한 강백호는? (출처 : 슬램덩크 18권)


'부들부들' 떤다. (출처 : 슬램덩크 18권)


 <슬램덩크>는 강백호의 분함을 '부들부들' 떠는 행동으로 표현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너무 분하면 말도 안 나오는 경험은 우리도 했고, 그래서 강백호가 얼마나 분한지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역시 대사, 내레이션, 인터뷰로 그때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부들부들' 컷을 이길 수는 없다. 영상 제작을 하는 우리는 '부들부들' 떠는 손 타이트샷을 넣음으로써, 분량을 줄임과 동시에 강렬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부들부들'  없다면? 그때의 감정에 대한 인터뷰만 있다면, 강렬함을 포기해야만 할까? 아니다. 이건 '리얼리티'다. 강렬함과 분량 조절을 위해 수정해도 된다. 촬영본을 뒤져 '부들부들' 타이트샷이 다른 상황에 있더라도 찾아 끼워 넣자. 없으면 찍어서라도 넣자. 그래도 되고, 그래야 한다. '손 하트' 타이트샷이라면, 강백호의 분함이라는 본질을 훼손하겠지만, '부들부들' 타이트샷이라면,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강화한다. 이건 훼손도, 왜곡도, 조작도 아니다. 재미만을 위해 본질을 훼손하면 조작이요,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재미를 위해 강화하 미덕이다. 과정이 좀 힘들긴 하겠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


 강렬함을 위한 '행동'을 찾으려면, 출연자가 어떤 '감정'일 때,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프로파일러, 정확히는 행동심리분석가가 되어 출연자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포착해야 한다. 그래서 도움이 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PD가 아니라 FBI 요원이 지은, <FBI 행동의 심리학>이란 책이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흔히 보디랭귀지로 불리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표정, 제스처, 신체 접촉, 움직임, 자세, 신체 장식(옷, 액세서리, 머리 모양, 문신 등), 심지어 목소리 등을 통해 이뤄지는 정보 전달 방법이다.
- FBI 행동의 심리학|조 버내로 저


 이 책은 인간의 꾸미지 않은 생각과 감정, 의도를 표출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여러 예시를 통해 밝히고 있다.


눈을 가리는 행동은 놀람, 불신, 그리고 의견 차이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불편하거나 의심 또는 불안이 있을 때 목에 손을 댄다.
어깨를 귀 쪽으로 올리는 거북이 효과는 자존심이 상하거나 갑자기 자신감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무릎에 지갑 같은 물건을 올려놓는 것,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리를 돌리는 것도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행동이다.


 이 책의 저자 조 버내로는 '상대방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관찰하면 그 사람의 감정과 의도, 행동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비언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 FBI 행동의 심리학|조 버내로 저


 시청자 몰입시키는 강렬한 영상을 만들고 싶다면 역시, '행동'을 찾는 꾸준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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