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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Feb 15. 2024

긴장감을 주는 방법

리듬의 기술 2.

 <슬램덩크>는 '긴장감의 바이블'이다. 해남, 능남, 산왕과의 후반전에서, 긴장감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출간 30년이 지난 지금도, 리얼리티 물은 물론,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 퀴즈쇼, 기타 예능, 교양 가릴 것 없이 긴장감을 주고 싶을 때, 소위 '쪼고' 싶을 땐 <슬램덩크>가 했던 방식을 답습한다. 특히 산왕과의 후반전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린 방식은 너무나 완벽해서, 긴장감에 있어서 만큼은 그 어떤 작품도 '산왕전'의 벽을 뛰어넘기가 힘들다. 이제 <슬램덩크>가 후반전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 번째는 '타임리밋'이다. 이들은 명확한 '끝'이 있는, 시간이 정해진 게임을 한다. 독자도 북산도 이 시간이 지나면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애가 탄다. '타임리밋'은 가장 전형적이지만 자주 쓰이고 효과 좋은 긴장의 요소다.


 두 번째는 '갈등'이다. '전국제패'를 향한 길은 매우 어렵다. 북산은 언제나 온 힘을 다해야 겨우겨우 이길 수 있는 강팀들만 만난다. <슬램덩크>는 시합 종료까지, 온 힘을 다해 겨우겨우 이기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후반전


해남전 후반 종료 20초 전. (출처 : 슬램덩크 15권)

 위 그림은 해남과의 후반전에서 강백호가 덩크를 성공시키기까지, 1초의 시간을 6개의 지면으로 표현한 것이다(사실 몇 개 지면이 더 있다!). 6개의 지면을, 우리가 아무리 빨리 읽어도 10초는 걸린다. <슬램덩크>는 경기 중 1초를, 최소 10초 이상의 체감시간으로 늘렸다. 어떻게 늘렸을까?


1) 1번 지면 시작은, 4개의 작은 컷으로 나눠 빠른 속도감을 줬다. 시합 종료까지 20초밖에 안 남은 급박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이어 채치수와 강백호의 큰 클로즈업 컷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강백호에게 집중하게 되고, 그의 활약을 기대하며 2번 지면으로 눈을 옮기게 된다.


2) 2번 지면은, 강백호의 페이크 동작으로 시작된다.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결정적인 순간, 배운 기술을 멋지게 써먹는 강백호를 길게 보여준다. 왜냐? 그의 성장을 제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이어 후속 동작과 관계자들의 리액션을 6개의 작은 컷들로 쪼개, 브레이크 걸렸던 속도를 다시 높인다. 이어지는 3번 지면에서, 더 중요한 덩크 과정에 집중시키기 위해 템포를 조절하는 것이다. 더불어 관계자들의 리액션을 통해 강백호의 성장을 다시 강조했다.


3) 3번~5번 지면은 강백호의 덩크 장면이다. 덩크의 시작, 중간, 끝. 강백호의 모든 동선을, 큰 컷으로 보여줬다. 독자들은 움직임의 원인과 결과를 길게 보며 완전히 파악하게 되고, 컷의 정보를 모두 파악했기 때문에 '느린 리듬'을 느낀다. 눈여겨볼 것은 3번 지면에서 골대에 내리꽂기 전, 관계자들의 리액션이다. 리액션 컷을 넣어서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래서 독자들이 강백호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게 만들 시간을 벌었다. 그 결과, 독자들은 이어지는 4번 지면. 두 페이지에 걸쳐 그려진 덩크슛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됐다. 5번 지면, 강백호가 덩크를 끝내고 골대에서 내려오기 전에도 관계자들의 리액션을 넣어서 시간을 지연시켰다. 이 시간을 통해 독자들은 '강백호의 덩크 성공'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이어지는 6번 지면. 그 결과가 폭발한다.


능남전 후반 종료 58초 전. (출처 : 슬램덩크 21권)

1) 1번 지면 역시 해남전처럼, 급박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5개의 작은 컷으로 나눠 빠른 속도감을 줬다. 이는 이어지는 2번 지면에서, 독자들을 윤대협의 득점에 집중시키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윤대협의 득점 과정은 느린 리듬으로 보여줄 테니까.


2) 역시 2번 지면에서는, 윤대협의 모든 동선을 살려서, 득점 성공 과정을 느린 리듬으로 보여준다. 눈여겨볼 것은 2번 지면 우측 페이지 하단, 윤대협의 플레이다. '슬로우'가 등장했다. '슬로우' 기법으로 시간을 연장했고, 그 시간 동안 윤대협의 탁월한 기량을 표현했다. <슬램덩크>는 윤대협의 소름 끼치는 기량과 림에 빨려 들어가는 공, 강백호, 채치수의 리액션까지 길게 보여주며, 북산이 이길 수 있을지 독자들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3) 다시 3번 지면에서, 무려 16개의 작은 컷으로 다시 속도를 높인다. 16개 컷 안에 각 선수들, 관계자들의 리액션, 임박한 종료 시간을 담아서, '북산의 마지막 공격 기회'라는 급박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4) 4번 지면 첫 컷에선 채치수의 공격을 큰 컷에 담아내, 빠른 리듬에 브레이크를 건다. 이 컷에서 독자들은 성공인지 실패인지 집중하게 된다. 그 후 채치수의 공격 실패부터 관계자들의 리액션을 7개의 작은 컷들로 나눠 붙인다. 실패 후 상황을 빠른 속도감으로 표현해, 독자들에게 현재 상황과 다음 상황에 대해 추측하게 만들어 혼란을 주기 위함이다. 이 와중에 '명암'으로 표현된 강백호의 점프가 역동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독자들의 혼란에 브레이크를 건다.


5) 5번 지면 역시, 해남전처럼 골대에 내리꽂기 전, 관계자들의 리액션 컷을 넣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덩크를 성공하기까지 강백호의 모든 동선을 살려 큰 컷으로 길게 표현했다(덩크 후 리액션도 묘사돼 있지만, 길어서 생략했다). 이어지는 6번 지면, 덩크의 의미를 해남전처럼 또 와이드 숏에서 폭발시켜 버린다.



긴장감을 주는 방법


 위 해남전과 능남전에서 살펴봤듯이, 긴장감을 주는 방법, 소위 쪼는 방법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정확히는, 중요한 부분에서 리얼타임보다 체감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왜냐? 독자들에게 결과를 늦게 보여줘, 조마조마 애태우게 만들기 위해서다. <슬램덩크>는 체감시간을 늘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사용했다.


1. 리듬의 조절


 빠른 리듬은 시청자를 추측하게 하고 따라가게 만들어 긴장을 유발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긴장감을 주고 싶다면, 시청자에게 현 상황을 이해시켜놔야 한다. '지금 상황은 알겠어!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궁금하도록, 추측이 아닌 기대의 영역으로 레벨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느린 리듬'을 주로 사용한다. 느린 리듬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빠른 리듬을 만들 때와는 반대다.


컷의 길이를 길게 하고, 커팅 비율을 줄인다.
충돌 요소를 활용해 브레이크를 건다.
대사와 감정 변화를 줄인다. 출연자의 목표와 감정을 고정시켜, 시청자도 샛길로 빠질 틈을 주지 않는다.
움직임의 시작, 중간, 끝. 그 동선을 모두 보여준다. 슬로우를 걸어 보여줄 수도 있다. 시청자가 움직임의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면, 속도감은 느려진다.


 이 방법들로 시청자는 출연자의 행동을 모두 파악하게 되고, 모두 파악하게 되니 추측할 일이 없어 리듬은 느려진다. 추측할 일이 없어진 시청자는 다음 장면이 궁금할 뿐인데, 리듬이 느려진 만큼 사건의 진행은 더디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다음 장면이 알고 싶어 애가 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속도는 '상대적'이란 것이다. 각 컷의 속도가 모두 같다면, 리듬이 느린지 빠른지 알 수 없게 된다. 리듬이 없어지는 것이다. 리듬이 없는 이야기엔 긴장감은커녕 집중하기도 힘들다. 생각해 보자. 스님들이 불경을 외우실 때도, 속도와 강약이 다른 리듬이 있다. '빠른 리듬'이 있어야 '느린 리듬'이, '느린 리듬'이 있어야 '빠른 리듬'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긴장감을 줄 때 '느린 리듬'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중요한 장면이 나오기 전 '빠른 리듬'을 만들어 템포를 조절한다.


 정리하면,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 컷 길이, 커팅 비율, 충돌, 움직임의 동선이나 속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느린 리듬'을 만들자. 이때, '빠른 리듬'을 섞어 템포를 조절해 '느린 리듬'을 강조해서, 시청자들의 체감시간을 늘려 애를 태우자. 퀴즈쇼에서 후루룩 맞추다가, 마지막 문제 정답 발표할 때, 같은 컷 몇 번 더 붙이고 슬로우 거는 것처럼.


2. 리액션


 <슬램덩크>는 리듬의 조절로 독자들을 애태운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해, 결과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켰는데, 바로 '리액션'이다.     


 관계자들의 리액션 컷을 행동이 일어나기 전 끼워 넣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우리가 대비하고, 기대할 준비 시간을 벌어줬다. 이 리액션 컷 때문에 다음 장면을 늦게 보게 돼서, 더 애가 타는 건 기본이고.     


 또,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끼워 넣어, 방금 일어난 행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뻐할 준비 시간을 벌어줬다. 그래서 결과가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중요한 행동이 일어나기 전과 후, 리액션 컷을 끼워 넣어 시청자를 애태우고, 같이 환호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자.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발표 전과 후, 관객의 리액션 컷을 넣는 것처럼.


3. 플래시백


 사실 <슬램덩크>가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한 최고의 방법은 이것이다. 바로 '플래시백'이라 불리는 회상씬이다.


안경 선배. (출처 : 슬램덩크 21권)


감상에 젖은 채치수. (출처 : 슬램덩크 30권)

 <슬램덩크>에선 매 경기 중요한 순간에 빈번히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능남전에선 권준호가 슛을 던진 후 골인하기까지, 한 챕터 전체가 '안경 선배'라는 권준호의 회상씬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슬램덩크>는 '플래시백'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 상황과 행동의 의미를 설명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을 지연시켜 애태우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효과는 '감동'이다. 독자들에게 히스토리를 알려줌으로써, 행동의 숨은 의미와 감정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슬램덩크>가 그저 그런 스포츠물이 아닌 '성장물'이 된 건, 이들을 변화시킨 행동의 의미를 '플래시백'을 통해 제대로 짚어준 덕이 크다.


 정리하면, 시간을 지연시키며, 출연자의 감정과 행동의 의미를 배가시키고 싶을 때, '플래시백'은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발표 직전이나 마라토너가 결승점에 통과하기 직전, 힘들었던 훈련 과정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방법의 집대성이 산왕전이다. (출처 : 슬램덩크 31권)

 산왕전은 긴장감과 감동을 주는 기술을 놀라울 정도로 활용한 블록버스터다. 예를 들어, 위 오른쪽 지면을 보면, 시간을 늘리기 위해 같은 슛 동작을 4개 구도의 컷으로 배치했다. 영상으로 말하면, 강백호 한 명에게만 4대 이상의 카메라를 붙인 것이다. 방송판에서도 이런 블록버스터는 보기 힘들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영상 일을 하신다면 <슬램덩크>는 안 보시더라도, 산왕전 만큼은 꼭 보세요. 두 번, 아니 백 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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