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은 성철에게서 고개를 돌려 영주와 지미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성철의 옆에서, 지미는 관객석에서 성철이 재미있는 말을 하면 웃고, 진지한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입 끝에 어린 미소가 성철의 입담을 끌어내어 주고 있는 듯했다. 저 미소가 민준에게 시간을 준 것이다. 천천히 삶을 받아들일 시간, 서툴러도 실수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믿게 해 준 시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민준은 '휴남동 서점'이라는 동네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원래 민준은 학창 시절부터 공부도 잘했고 명문대학을 들어가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수재였다. 대학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학점을 잘 쌓아놓으면 어디든 무난하게 입사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에게 닥치는 현실은 절대로 녹록지 않았다. 지원서를 넣고 서류합격까지는 가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을 거듭해야 했고 결국은 스스로에게도 부모님께도 기대에 어긋난 실패자로 남게 되었다. 일명 '백수'가 된 그는 울먹이며 한숨짓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아내는 일도 버겁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휴남동 서점에서 '바리스타 구합니다'라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고 그 길로 서점 카페 알바생이 되었다.
서점 대표인 영주도, 영주의 서점 카페에 원두를 공급하는 지미도 민준의 과거를 캐묻거나 젊은 사람이 왜 번듯한 직장은 안 가지고 그러고 있냐고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다. 그저 그곳에서 민준은 커피를 잘 내리는 성실한 바리스타였고 사람들은 민준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웃고, 진지한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민준이 무엇을 하든 있는 모습 그래도 받아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는 휴남동 서점의 사람들로 인해 민준은 지금 이때를 그리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과거의 실패한 자신과 화해를 이루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법 또한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민준이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질문과 씨름하며 해답을 찾아가야 할 '시간'과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신뢰의 '미소'를 준 참 좋은 이웃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시간과 미소가 필요했던 사람은 민준만은 아니었다.
서점대표이자 주인공인 영주도, 원두를 공급하는 사장 지미도,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퇴사하고 영주의 책방 한구석에서 하루 종일 뜨개질만 하는 정서도, 공부 때문에 엄마와 갈등 중에 있는 고등학생 민철이도... 모든 휴남동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간과 미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아낌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잔잔하게 시간과 미소를 주고받는 곳이 바로 휴남동 서점이었고 그 결과 이들 모두 세상이 말하는 빛나는 성공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힘을 얻는다.
살아가다 때로는 멈춰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데 그럴 때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과 미소가 아닐까... <휴남동 서점>을 읽는 동안 서점이 주는 따뜻함이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쩌면 이곳 휴남동 서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과 같은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도 넘어진 누군가에게 시간과 미소를 주는 곳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러고 있지 말라고, 지금이 그럴 때냐고, 언제 저만큼 올라갈 것이냐고 끊임없이 다그치기 일쑤이다.
지난가을 휴학한 작은 딸아이가 여섯 달 내내 뜨개질만 하고 있다. 마치 휴남동 서점 구석에서 뜨개질만 하는 정서와 같이...
휴학을 결정하던 때는 뭔가 계획이 거창했었다. 영어 공부도 하고 몇 가지 자격증도 따고 교환학생 준비도 하면 좋겠고... 그래서 나도 남편도 졸업 전에 차라리 그런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휴학을 하고 나니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를 가는 것 외는 집순이가 되어 유튜브로 뜨개질에만 집중하고 앉았다. 워낙에 손재주가 좋아서 아이의 손에서 실꾸러미가 니트도 되고 모자도 되고 장갑도 되는 신기한 순간에 환호하기도 하고, 덕분에 나도 멋스러운 셔츠 하나를 얻어 입게는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냥 저러고 있어도 되나...'염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초기에는 물어도 보았다. 왜 계획과 다르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거냐고...
아이의 대답은 그냥 이렇게 한번 지내보고 싶어 졌다는 것이었다.
홈스쿨을 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도 거의 혼자 힘으로 3년 동안 공부해서 진학을 이루어냈고
공부하기도 버거운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 동아리 활동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하던 아이이다 보니 왜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놓고 저렇게 지내고 싶어 졌을까 궁금하다 못해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가 그렇게 우울하거나 어두워 보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천천히 고요하게 자신의 일상을 지내고 있는 것이었고 이보다 더 다행인 것은 그런 아이를 보면서 나도 남편도 한 번도 왜 그러고 있냐 다그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편도 나만큼이나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속이 복잡하지 않았겠냐만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봐 주는 덕에 나도 마음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아이가 자라는 모든 과정을 지켜봐 온 친구에게 뜨개질만 하는 아이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친구는 걱정하지 말라고, 야무지게 제 할 일 잘 알아서 하는 아이니 그런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하고 기다려주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런 좋은 친구의 조언에 더해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게 되면서 지금 우리 아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때인가 보다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놓였다.
열심히 달려왔지만 졸업 후에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우리 작은 딸에게도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두려워지지 않겠는가. 그런 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민준이처럼 "천천히 삶을 받아들일 시간, 서툴러도 실수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믿게 해 준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편안하게 내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불안하다고 내 기분에 따라 다그치지 않은 것이, 그저 침묵해 주었던 것이 참 다행이다.
아이는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다녀와서 자기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뜨개질에 열중한다. 친구가 그러길 뜨개질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좋은 활동이라고 한다. 남들은 몰라도 아이에게 이 시간이 중요한 시간이라면 불안을 내려놓고 미소 한 모금 머금고 아이를 바라봐 주자.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결실을 맺으면 아이는 다시 일어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또박또박 걸어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휴남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작가가 가상의 동네 이름을 지으면서 '휴(休)'자를 넣은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줄곧 성공과 성취를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갈 공간, 자기를 추슬러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을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곳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휴남동이라 이름 지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게는 휴남동이 필요하다. 수많은 민준이와 같은 청춘들에게 가족이, 사회가 시간과 미소를 주는 휴남동이 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래서 좀 더디 가는 것 같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가는 민준이와 같은 사람들이 격려받고 행복해지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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