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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Oct 07. 2024

60년 썼으면 됐지

기억에 남을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30도를 훨씬 넘는 날이 이어지고 있으니 가을은 저만치에 있다. 9월 초인데 34~5도라고 한다. 강아지를 앞세워 산책하는데, 늦은 시간을 골랐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그런데 어라! 벌써 누르스름하게 변해서 땅에 떨어진 낙엽이 발끝에 챈다. 병든 이파리가 떨어졌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벚나무 잎사귀가 어느덧 듬성듬성 노랗게 물들어있다. 모든 나무가 그러했으니 병이든 게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자 스산한 가을 거리처럼 낙엽이 뒹굴고 보도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도 한여름의 기분으로 지내는 시간에 어째서 벌써 낙엽인가. 이렇게 일찍 떨어지는 잎새를 예년에도 보았던가 했다.     

  

기상학자들은 해마다 꽃샘바람이 불면 벚꽃이 언제 피어날지를 예측한다. 기온을 예측하여 대충 정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고, 따사로운 봄볕이 가만히 있는 꽃망울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측에는 수학의 적분(積分) 개념을 사용한다고 한다. 2월 1일부터 매일의 평균기온 합이 400도가 되거나, 최고기온의 합이 600도에 도달하는 때*로 특정한다고 한다. 오랜 관찰로 그 법칙을 알았을 것이다.

  

벚꽃이 피는 데에 그런 정교한 이치가 숨어 있다니, 오늘 이렇게 이른 낙엽을 보니 한세월 보내고 잎사귀를 떨구는 것에도 그런 이치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나무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잎새도 지낸 시간 온도의 총합이 정해진 수치에 다다르면 수명을 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 이치에 따라 유난히 높은 기온이 이른 낙엽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한여름 날씨에 벌써 낙엽이 되어 떨어질 까닭이 달리 있겠는가.

  

나이 들면 신체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더라는, 인생 선배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이 이제 실감이 된다. 젊을 때부터 몸을 아끼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어도 파랗던 시절에 그 말이 귓전까지도 도달했겠는가. 만년 청춘처럼 아낌없이 내 몸을 부렸던 시간이 지나자, 이제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낸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한결같은 말을 한다. 내가 갔을 때도, 아내가 갔을 때도 똑같다. “아니, 60년이나 썼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며, 왜 정해진 순리를 거스르려 하느냐는 투로 면박을 준다. 처음 어느 누가 쓰기 시작했는지 몰라도 의사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그 말을 쓰고 있다.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정말 60년이 신체에 허락된 그 시간일까 싶어 섭섭해지기도 한다.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나듯 생물로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절대 진리다. 하지만 오늘 한여름의 날씨에 벌써 낙엽이 되어 뒹구는 잎새를 보니, 그 진리는 대충 두루뭉술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교한 법칙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조물주는 인간이 피고 지는 이치를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은 허락지 않을 것 같다. 60년이라면 서글플지니, 너희는 꽃이 피고 잎새가 지는 이치까지만 알고 있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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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개화 시기 예측 : 수학의 적분을 이용하여 유효적산온도(발육에 필요한 온량)에서 발육

  에 필요한 최저온도(발육 영점온도)를 뺀 누적 값으로 예측

  - 400도의 법칙 : 2월 1일부터 매일 평균기온을 더해 400도에 도달 시 개화

  - 600도의 법칙 : 2월 1일부터 매일 최고기온을 더해 600도가 될 무렵에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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