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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Mar 08. 2023

노름과 놀음

 어느 날 TV에서 도박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다가 아내에게 ’초등학교 육 학년이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쳐 날마다 밥숟가락 놓으면 골방에 모여 종일 노름하는 녀석이 있다면, 그런 놈을 어찌 생각하노? ‘물었다. 아내는 ’세상에 그런 나쁜 놈도 있나? ‘한다. ‘그게 바로 나였다" 했더니 설마 하며 한참을 바라본다.     


 육 학년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 전 긴 겨울방학 때다. 내가 자란 동네는 좀 거친 환경이었다. 그때 한 두어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밥숟가락 놓으면 동네 친구 집 골방에 모여 짓고땡이나 화투 노름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 또래가 대부분이었으나 담배까지 뻑뻑 피워대던 몇 살 위 동네 선배들도 있었다. 양지바른 돌담 옆에서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하던 놀이도 겨울이 깊어 짐에 따라 견딜 수 없이 시려 오던 손이 바람 없는 곳을 찾은 곳이, 부모님이 모두 일 나가시던 어느 녀석의 호기로운 첫 초청이 있었던 후로 그 골방은 계속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구슬을 가지고 삼치기(짤짤이)를 하다가, 아이들이 많아지자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화투로 ‘짓고땡’이나 ‘섰다’ 같은 노름으로 구슬 따먹기를 했다. 구슬을 다 잃으면 구슬이 많은 아이에게 돈 주고 사는 것이 발전하여 어느덧 구슬보다는 십 원짜리, 백 원짜리 동전이 노름판을 차지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돈이 떨어지면 집에 달려가 엄마 지갑을 열어 몇 푼 몰래 가져가는 나쁜 행동은, 첫 번째가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지만, 나중에는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몰래 지갑을 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그러다 보니 가끔 '왜 지갑의 돈이 비지?' 하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실 때는 가슴이 덜컥덜컥하였다. 그래도 설마 착한 아들이 돈 훔쳐 갈 줄은 꿈에도 생각 안 하고 당신의 기억력의 노쇠로 돌리시곤 하셨다.     


 이러다 보니 조금의 남은 양심과 또 완전 범죄를 꿈꾸고자 돼지 저금통에 손을 대었는데, 그것은 표시도 바로 나지 않고 흔적도 거의 없었으니 점점 액수는 늘어갔고 다만, 억지로 손가락으로 눌려 돈을 꺼내는 바람에 동전 들어가는 입구가 자꾸만 짜부라져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화투장이 왔다 갔다 하고 설악산단풍잎과 내장산단풍잎이 눈에 아른거렸다. 중학교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은 수업 시간에도 화투장이 아른거려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긴 졸업 방학 동안 두 어 번의 의심은 받았으나 탄로 나지 않고 혼자의 비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성은 다 착한 동네 녀석들, 모두의 맘속에도 이게 아닌데 빨리 여기서 헤어나야 하는데 하는 마음은 있었는가 보다. 달포 이상 계속된 이런 생활은 설이 지나고 해동이 될 때쯤 동네에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시작한 골목길을 흐르던 하수구 복개 공사를 동네 분들이 스스로 하면서, '이놈들! 너희들도 나와서 일 좀 도와라' 하는 어른들의 호통에, 우리 모두 후련한 표정으로 퀴퀴한 골방을 박차고 밝은 하늘 아래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바람에 봄이 실려 오던 때였다.      


 이런 이유로 습관이 될 뻔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요즘 나는 거의 웬만하면 화투나 카드는 하지 않는다. 어릴 적 그렇게 수많은 연습(?)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모여 화투나 카드를 치면 거의 항상 지갑이 털린다. 한 번도 아니고 거의 매번 그러니 아예 손을 놓게 되었다. 혹시 재수가 좋아서 좀 따기라도 하면, 어째 뒤통수가 화끈거리고, 꼭 죄인이 된 듯이 미안스러워 그럴 바에야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이다.     


 우수마발(牛溲馬勃*)도 쓸데가 있다더니, 그 어이없는 노름 행각도 살면서 일생에 도움이 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암산 능력이 발달된 것이다. ‘짓고땡’은 화투 세 장으로 10과 20을 맞추고 나머지 두 장의 끗수로 승부를 가리는데, 하루에도 수백 번을 세 개의 숫자로 10의 배수를 만들다 보니 그 숫자 조합들이 자연히 머리에 각인되었다. 예를 들면 2, 3, 5는 10이고, 3, 8, 9나 5, 6, 9는 20과 같이, 짧은 시간에 세 개의 숫자로 10과 20을 만드는 능력(?)이 개발되었으니 수를 셈할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지금까지도.  


 도박과 노름이 사전의 의미는 똑같다. 그러나 왠지 도박은 좀 더 한방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뉘앙스이고, 노름은 퀴퀴한 봉놋방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 속의 찌든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퀴퀴한 골방에서의 경험은 노름에 딱 맞는 풍경이었으나, 노름이라기보다 ‘놀음’이 아니었을까 하며 기억에 남은 작은 죄의식을 흐려본다.     


*우수마발(牛溲馬勃*) - 소의 오줌과 말의 똥이라는 뜻으로, 가치 없는 말이나 글 또는 품질이 나빠 쓸 수 없는 약재 따위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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