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hould comfort the disturbed and disturb the comfortable"
진리에 대한 나름의 일가견이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산재해 있다. 철학과 과학, 종교 또는 개개인의 인생관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진리는 크게 보았을 때 단일성의 성질을 띠곤 한다. 진리란 본래 보편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대체될 수 없고 불변할 수 없는, 불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변성, 규격성은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진리의 필수 조건이다. 나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정의를 '닫힌 진리'라고 부르고 싶다. 닫힌 진리는 총체성(또는 자연, 즉 모든 것)을 대변하기에 진리보다 큰, 또는 이보다 더 심층적인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진리를 더는 진리가 아니게 만든다.
-닫힌 진리의 예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변해선 안 되는 불변의 것이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변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바로 상위의 초월적인 개념으로 하위 현상의 다발들을 묶으면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 '모든 것은 변한다' (여기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이었지만 더욱 커다란 개념으로 묶음으로써 '모든 것은 변한다'가 '모든 것'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총체성)의 범위를 마치 변증법의 정반합처럼 전개하여 더욱 상위의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닫힌 진리'가 있다면 '열린 진리'도 있을 것이다. 열린 진리는 규정하는 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에서 열린 진리는 이 명제 전체를 지시하기보다 이 명제 안의 '모든 것'에 집중한다. 진리는 곧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역설이다. 진리는 모든 것을 품은 것이어야 하지만 보편성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진리가 이렇다면 우린 진리탐구에 매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의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1은 1이다'를 우리는 확장적으로 또는 심층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이를 아무리 분석해도 결국 같은 결론(1은 1이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수많은 노력은 그 과정에서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이들이 정말로 '진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해도 이를 결코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것' 즉,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를 '언어'라는 전달 매체 속에 '담아야'한다. 하지만 진리는 곧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담을 만한 '그릇'이 없다. 한 인간이 진리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은 곧 그 '무한한 한계'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임을 뜻할 것이다.
짐작했듯이 나는 여기서 인간이 진리로 다가갈 수 없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진리를 통한 이차적인 가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예술이라는 '주머니 속 아주 불편한 송곳'을 소개하고 싶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술에 대해 논해보자. 나는 이전에 우리가 진리라 부르는 것들에 대한 모순점들을 분석했다. 진리라는 개념은 이리 지리멸렬하다. 똑바로 정리되어있지 않고 모순 속에서 모순이 아님을 외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처럼 진리는 스스로 진리라 외치지만 진리라 하는 순간 진리가 아니게 된다. 여기서 예술과 철학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철학에서의(통상적인 맥락에서의) 진리는 스스로 진리라 불러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에 무관심하다. 예술은 진리를 기술하려 들지 않는다. 예술은 스스로가 진리인지 아닌지 인식되는 것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예술은 무관심하다. 또는 우리가 그리 인식한다. (예술은 '정해놓은 것' 바깥의 것이다. 그래서 '정해놓은 것'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예술의 '무관심성'의 특징을 발견한다.)
이런 자유로운 성격의 예술을 나는 왜 송곳이라 했을까. 바로 예술의 정립되지 않은 본질 때문이다. 예술은 마치 정면을 영원히 볼 수 없는 한 초상화와 같다. 예술은 진리를 이것이다 규정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진리'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기까지 한다. 이렇듯 예술은 뚜렷하다 할 정면이 없다. 예술은 마치 개념이라는 기둥 사이사이의 틈새와도 같다. 서로 떨어진 기둥을 새우면 그 사이의 틈새가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처럼 예술은 이 간극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 간극은 가장 '실제적인' 우리의 삶이다.
개념이라는 기둥은 공간을 최대한 채워서 궁극적으론 모든 공간을 채우길 원한다. 그러나 영원한 공간을 그리 채울 수 없다. 언제나, 항상 간극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불편한 간극을 예술은 집요하게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