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오고 난 후에 기온이 조금 떨어지니 단풍 색깔이 더 붉게 변한다. 갑자기 바람이 부니까 빨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며 예쁜 단풍나무 주위로 붉은 그림자를 하나 가득 쌓아 놓는다.
오늘은 어떤 분들과 라운딩을 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올림픽 CC에 도착하니 나이가 지긋한 60대로 보이는 노부부와 40대의 젊은 남성이 기다리고 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몸을 푸는데 노부부의 몸동작이 매우 유연하다.
노 사장님은 폼도 좋고 체격도 좋은데 스윙이 아주 간결하다. 가볍게 치는 것 같은데 거리가 짧지 않다. 방향도 아주 좋다.
“굿 샷인데요! 가운데로 잘 갔어요.”
나이 드신 노 사장님의 샷을 보면서 드라이버를 치려니 괜히 힘이 들어간다. 공에 힘이 들어가니 약간 왼쪽으로 당겨진다. 남은 거리를 보니 가운데로 간 노 사장님보다 세컨드 샷이 더 많이 남아 있다.
180 미터 남았는데 충분히 투 온이 가능한 거리다. 그런데 앞바람이 있다. 잘 가던 공이 힘없이 뚝 떨어진다.
노 사장님은 우드를 잡고 가볍게 스윙을 한다. 역시 투 온에는 실패했지만 거의 그린 주변까지 굴러간다.
“나이스 샷.”
노 여사님이 노 사장님의 샷에다 나이스 샷을 외쳐 준다. 노 여사님 또한 드라이버 샷을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보낸 후 우드 샷을 준비한다. 역시 샷이 좋다. 거리도 나고 방향도 좋다.
나는 어프로치가 길어서 홀을 지나가고 어렵게 투 퍼트로 막아서 보기를 기록하는데 노 사장님은 어프로치로 홀 컵에 붙여 첫 홀에 파를 기록한다. 노 여사님도 투 온 시킨 후 투 퍼트로 파를 기록한다.
‘골프 스코어와 나이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근력이 떨어져서 비거리를 내는 데는 어렵지만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숏 게임은 안정적이며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여사님, 사장님, 골프 참 잘 치시네요, 에러도 하나 없고요.”
“아, 저 양반이 예전에는 골프장에 돈 좀 갖다 바쳤죠. 10년 전 까지는 항상 싱글 쳤어요. 이제는 나이가 먹어서 거리가 안 나요.”
“사장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올 해가 71살이에요.”
"예~~ 에!"
노 여사님은 68세인데 골프를 좋아해서 부부가 함께 걸으면서 골프 칠 수 있는 올림픽 CC를 즐겨 온다고 한다.
“그런데 두 분이 너무 젊어 보이세요?”
노 여사님은 젊어 보인다는 말이 싫지 않은가 보다.
나이가 들 수록 나눌 수 있는 경험은 늘어가고 지혜의 문이 열린다.
지난달에 다국적 기업 인사 담당자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는데 회장을 맡고 있는 J사의 박 전무님이 반갑게 맞는다.
“이 전무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네요. 지난 모임에는 해외 출장 때문에 참석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곳으로 옮겨 오셨어요?”
“이제 한 달 됐네요. 옮긴 지 얼마 안 되어서 어수선합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회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박 전무님이 J사에 취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회원들의 귀가 박 전무님을 향한다.
“60세에 은퇴하고 다른 회사에서 잠시 일하고 있는데 써치 펌에서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노조를 경험해 본 사람을 찾고 있더라고요.”
박 전무님은 노조에 관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업계에 소문이 나 있는 분이다.
“J사 사장님까지 인터뷰를 하고 오퍼를 받았는데 바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요?”
회원들이 궁금한 듯 동시에 물어본다.
“아, 그게. 그때 다른 곳에도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그 결과를 보고 결정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 회사 프랑스 사장님께서 식사나 하자고 전화를 직접 주셨어요. 그래서 저녁 식사 자리에 불려 나갔죠.”
“미스터 박, 왜 우리 회사 오퍼에 답을 안 주시는 겁니까? 더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회사의 인터뷰 결과를 기다리느라 답을 못 드렸습니다.”
“미스터 박, 혹시 ‘인턴’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네 보았습니다.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가 일품이었죠”
“미스터 박, 저는 젊은 인사 전문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로버트 드니로’가 열연한 ‘벤’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습득한 전문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우리 회사의 젊은 인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인사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벤’과 같은 역할을 해 주세요.”
“와, 사장님 말씀이 가슴을 때리는 거 있죠. 그래서 바로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 회사에서 제 경험과 지식을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계약해 주십시오.”
“오케이. 일단 4년 계약하지요. 그리고 4년 후에도 미스터 박이 더 일하고 싶다면 추가 계약하기로 하지요.”
너무 멋있다. J사 사장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다. 설득력 있는 말 한마디로 박 전무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너무 보기 좋다.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을 높이 사고 직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사장님께 박수를 보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여러분에게는 저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열려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박 전무님의 격려에 모두 기분 좋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노 여사님은 홀을 지나면서 길가에 늘어 선 단풍나무와 각종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가을 색에 빠져든다.
9홀을 다 치고 다시 첫 번째 홀을 시작하려는데 가방에서 바나나를 꺼내 캐디와 동반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다.
“이거 한번 먹어봐요. 이 바나나는 정말 맛있어요. 다른 바나나와는 달라.”
약간 시장기를 느끼던 차에 노 여사님이 주는 바나나를 먹어 보니 정말 맛있다. 여사님의 나눔의 마음과 배려가 담겨 있어서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다.
“나이를 먹으니까 더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친구들도 주머니를 여는 친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고요.”
노 부부처럼 나이가 먹어서도 골프를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싱글 플레이는 되지 못해도 부부가 같이 그린을 거닐 수 있고, 가을 단풍을 느끼며 가는 세월을 붙잡았으면 좋겠다.
노 부부처럼 친구들에게는 밥 잘 사 주는 친구로 남아있고 동반자들에게 바나나 하나를 나누며 인자한 미소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믿으며 세상 속에 자신 있게 서있는 박 전무님처럼 인생은 60부터 라고 믿으며 살고 싶다. 내가 가진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나이가 먹을수록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