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학교에 혼자 갈 수 있어요. 엄마는 데려다주지 마요. 데려다주는 거 좀 싫어요."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 지난 무렵, 갑자기 학교에 혼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당시에 1학년이었고, 코로나 유행이 시작한 첫해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학교에 가는 횟수가 몇 번 안되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등굣길을 혼자 간다는 게 걱정스러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서 갈 수 있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큰 길만 한번 건너 주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로 아이는 하교할 때도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집에 혼자 오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제 본인이 나름대로 컸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를 너무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아기처럼 보이기 싫다는 이유였다.
나는 서운함과 해방감이 공존하는 그 복합적인 감정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항상 내 품으로 달려오던 아이가 이제 세상 밖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반가워하던 아이의 얼굴, 어쩌다 유치원으로 직접 데리러 가면 깜짝 놀라며 기뻐하던 아이의 얼굴은 이제 학교 앞에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한 번은 하교 후 곧장 큰 아이가 좋아하는 스파이더맨 영화가 개봉해 같이 보려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큰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교문 밖에서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런데 날 보자마자 대뜸 한 이야기는 "엄마 왜 이렇게 자주 와요."였다. 나는 순간 큰 아이에게 서운함을 넘어 약간 억울하기까지 했다. '내가 지 좋으라고 할 일도 많은데 내팽개치고 부랴부랴 왔는데...... 또 지 눈치 보여서 자주 오지도 않았구먼.' 마치 연애하는 것처럼 아들과 나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는 꽤나 팽팽했다.
지나고 보니 나의 감정에 앞서서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아이가 학교 끝나고 엄마랑 단둘이 좋아하는 영화 보면 분명히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만 있었고, 아이의 상황이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큰 아이 입장에서는 갑자기 엄마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교문 앞에서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있으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이의 진짜 속마음은 '엄마랑 영화 보는 건 좋지만 이렇게 약속하지 않은 상태로 엄마가 오는 건 싫어요.'였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이는 내 품에서 떠날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어미 새는 아기 새에게 새가 새 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나는 법을 알려주고 둥지를 떠나게 한다.
나는 아이들이 떠날 때 무엇을 가르쳐주고 이 둥지를 떠나게 해야 할까?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역시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라 내 가르침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렵지만, 너와 내가 같이 커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이가 내 손을 놓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다가 가끔 힘들 때 언제든 잡아도 된다고 알려줄 것이다. 누군가 잡아줄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큰 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