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연휴 끼고 쉴 수 있는 날이 생겨서 아이들과 제주도를 갈 계획을 급하게 세웠다. 연휴라 그런지 가려던 리조트 객실은 거의 마감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자리가 몇 개 남아있어서 아이들에게 말하고 같이 예약을 하려던 찰나 정말 꿈에서조차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여행의 빨간불을 밝힌 건 바로 큰아이였다. 3박 4일로 목요일에 출발해 일요일에 오려던 계획이었는데, 아이는 금요일에 영어학원을 가야 한다며 쉬는 날 가고 싶다고 했다.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에 있고 싶던 나의 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따지고 보면 아이 말은 틀린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설득을 해보기로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옛 말씀은 틀린 적이 없었다. 먼저 우리가 가려던 곳의 사진을 보여주고, 어디서 어떻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아이에게 보여줬다. 조금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그래도 금요일에는 영어학원을 가야겠단다.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무려 얼마 만의 제주도인데 아직 10살밖에 안된 아이의 스케줄 때문에 33살이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두 번째 시도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갔다. '너 초등학생 아니면 시간 없어서 이렇게 놀러도 못 가. 방학 때 중고등학생 되면 공부만 해야 해 지금이 기회야!'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저번에 레벨 테스트 끝나고 학원을 한번 빠졌기 때문에 또 안 가면 너무 자주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두 번째 작전도 한 방 먹었다.
아들의 고집이 대단했지만, 이 고집이 누구한테서 나왔겠는가.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작전은 회유였다. 선생님께 엄마가 다 말씀드리고 진도 나간 데까지 엄마랑 공부하면 되니 놓친 거 있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또 책상에서 배울 수 없는걸 엄마 아빠는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면서 나름 교육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엄마가 엄청 놀러 가고 싶다는 걸 포장했지만 먹히지가 않았다. 학원비도 아깝고 새로운 반 첫 수업인데 첫 수업은 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초3이 고3처럼 얘기하는데 할 말 이 없었다. 나의 완전한 K.O 패였다.
속으로 '학원비 네가 내냐? 내가 내지!'를 외쳤다. 내 안에서 부모로서의 자아와 육아 스트레스에 찌들어 놀고 싶은 자아의 빅뱅이 일어났다. 둘째는 형을 째려보며 형아 왜 그러냐고 당연히 학원을 빠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쭉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안은 카오스의 상태였지만 부모로서의 정신을 부여잡고 혹여 큰아이가 죄책감이 들까 봐 둘째에게도 형아 말이 맞고 어차피 자리도 없었다고 얘기했다. 쉬는 날에 갈 수 있도록 엄마 아빠가 열심히 찾아본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잠자리에 들게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식탁에 앉아 부글부글 거리는 나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어찌 보면 참 바람직한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겠는데 솔직한 감정으로는 이런 건 반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의 계획은 언제든 부모에 의해 무시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니 아직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경중을 따지자면 부모의 계획은 항상 무거운 쪽이고 아이의 계획은 항상 가벼운 쪽이었다.
깨달음을 얻으니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가셨다. 아직도 부모로서 부족하고 어른으로서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아이도 나도 마음 편한 여행을 계획해야겠다.(착하게 살 테니까 제발 휴일에 리조트 객실 자리 나게 해 주세요. 제발.)
덧.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