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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믿음이 나를 아프게 할 때

엄마는 평생 나쁜 기억을 지우며 살았는데, 이제는 나쁜 기억만 남았다

by 공감수집가

다음 날 연차를 쓰고 엄마 일터를 찾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아무 일도 없었다.

"엉뚱한 소리를 자주 하긴 해요. 그래도 부족한 부분을 매우려는 건지, 싹싹하고 일도 꼼꼼히 잘하려는 게 보이니까 이쁘지."

큰 언니의 칭찬이 쏟아진다.

"꼭 정신 쪽 관련된 병원을 데려가 보세요."

증상을 감추려는 노력은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직장 동료들로부터 사실 확인이 된다면 당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겠다던 엄마.

약속은 덧없었다.

모든 정황을 다 듣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한 마디.

"언니들은 몰라. 어젯밤도 소장이랑 젊은 남자 둘이 집에 와서 내내 문을 두드렸는데."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망상 증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고, 혹시라도 연락이 두절되거나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우울과 불안 증세가 망상을 더 키울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추가된 신경안정제 한 알이었다.

1 시간을 기다려 들어갔건만, 3분 만에 진료가 끝나려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를 먼저 내보내고 토로했다.

"모든 치매 환자들을 이렇게 대하시나요? 대충 증상 듣고 약 처방하고 끝?”

“그럼 뭘 원하시죠? 치매환자가 이 정도 증상도 없을 거라고 기대하셨어요? 가족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내 옆에 붙어 다닐 수도 없잖아요? 입원은 가능해요?”

“입원은 망상 증세를 부추길 수 있어요. 권하지 않습니다."

“증상을 설명해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질문도 없고. 이렇게 해보자도 없고. 그저 약 하나 추가요?”

“헛것을 보거나 환청은 없잖아요. 그리고 지난번에 보여준 정신건강의학과 약 드시고 계신 거 아니에요?”

“그건 이사 전에 처방받은 약이고 이사 후에는 그 병원에 갈 수도 없고 복용도 안 했어요.”

여태 본인 환자가 어떤 약을 복용하는지도 몰랐다니.


분위기를 느꼈는지 의사가 앉으라며 의자를 내민다.

신경과에는 대부분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온다. 왜 진료 의자는 한 개뿐일까.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길게 쏟아냈다.

자신을 위협하는 젊은 남자라는 헛것. 매일 새벽 창문과 현관문을 두드리는 환청. 6개월째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

가장 궁금했던 점 하나.

망상 증세에 대해 사실 확인 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알려드리는 게 맞을까.

아니면 그랬구나, 힘드셨겠구나 하며 맞춰드리는 게 맞을까.

"감정에 대해 공감은 하되 사실대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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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들이 달려온대요.

어렵게 다른 주제로 넘기고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던 찰나.

또 그 도둑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숟가락을 놓고 식당 밖으로 나간 적도 있다. 전화로 역정을 낸 적도 수차례.

의사의 조언대로 먼저 엄마의 불안함에 대해 경청하고 마음을 보듬는 노력을 해봤다.

"가는 곳마다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엄마가 느낀 불안함, 공포감은 사실일 거예요. 다만, 그게 진짜는 아니니까 지지 말아요."

그리고 엄마를 불안하게 하는 상상 속 인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천히, 차분히 설명해 보았다.

"내가 착각한 거니?"

받아들이는 듯하다가 다음 날이 되면 반복된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긴다.

엄마의 상상이 잘못된 것임을 습관적으로 말하다 보면, 결국 어떤 기억도 믿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쳤다.

이럴 땐, 다른 사례를 들어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엄마 제가 유튜브에서 봤는데요. 어떤 치매 할머니는 딸이랑 같이 있다가도 '저기 애기들이 나한테 달려오네. 아고 귀여워라.' 한다는 거예요. 바로 옆에 있는 딸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딸은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래요. 제가 그 심정이에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통하는 것 같았다.


몹쓸 기억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엄마에게는 유독 많은 사연이 있었다. 아마 살기 위해 잊고 싶은 기억도 많았으리라.

아픈 기억을 지우는 습관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일까.

근데 왜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기억은 지우지 못하는가.

요즘 엄마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

"몹쓸 기억에 지지 말아요. 나쁜 기억은 버리고 좋은 기억만 오래오래 가져가세요."


엄마는 평생 나쁜 기억을 지우며 살았는데, 이제는 나쁜 기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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