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나의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깊이 생각을 해봤다. 할머니의 이야기만으로 내 흉터의 원인을 정해버릴 수는 없었다.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보았다.
일단 그렇게 된 시점이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는 전혀 아니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건 내가 8살 때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다친 것이라면 내가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하체 뒷부분 전체에 걸친 화상이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내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다쳤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내가 정말 아기였을 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나와 내 동생이 연년생임을 감안하면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일인 듯하다. 왜냐하면 동생은 그런 상처가 없다. 이런 추론은 할머니가 말한 시점과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아기 때에 그런 것은 맞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기어가서 그곳에 빠져서 사고가 난 건 절대 아니다. 방에서 주방까지 혼자 기어서 갈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그걸 엄마가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설령 그렇게 아기가 혼자 기어갔다고 하더라도 엉덩이와 종아리에 화상이 있을 확률보다는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머리가 다쳤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하지만 머리에는 그런 흉터가 없다. 심지어 내 뇌도 우둔한 쪽보다 조금은 똑똑한 정상인에 가깝다. 한마디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한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 많이 속상하다.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고, 여전히 엄마가 나의 엄마였던 바로 그 시간에 내가 다쳤다는 것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모르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대 그걸 모를 수 없다. 설령 내가 혼자 기어가서 빠진 사고였다 할지라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비인격적이고 그저 폭력적인 성향만 가득 담긴 아버지의 행동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외도를 하면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그 아이인들 사랑 할리가 없다. 외도와 폭력으로 인해 마음이 떠난 상황에서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분노조절이 안되어서 아이를 죽여버리겠다고 불구덩이에 던진 걸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아버지의 성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자기 엄마에게 - 그러니까 나에겐 할머니 - 소리를 지르면서 화분을 집어던지기도 했으니깐. 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아니라면 다른 가능성은 뭘까? 설마 엄마가 장본인인가? 사고였다면 어떤 사고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그런 것이라면,
"니 아빠가 널 죽인다고 그랬다"라고 얘기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엄마와 헤어진 후 25년이나 지나 성인이 되어서 만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엄마가 고의로 그런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도대체 왜?
아주 솔직하게 객관적인 차원으로 엄마가 가출을 했던 건 어떤 면에서는 충분하게 그럴만했다. 남편이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그걸 미안해하거나 잘못을 빌어도 모자란데, 심지어 되려 매일 때린다면 충분하게 나갈만한 이유가 된다. 문제는 아이다. 임신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을 거다. 추측하건대 진즉에 나가고 싶거나, 아니 진즉에 이 결혼을 깨뜨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가 생긴 거다.
‘이 아이만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도 비난하거나 원망하거나 속상하지 않다.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심지어 남편은 생활비도 전혀 주지 않는다. 삯바느질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상황에 남편은 외도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른다면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 것이다. 아니, 반대로 죽이고 싶은 생각도 당연하게 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죽여도 벌써 죽였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외도를 하고 자기를 매일같이 때리는 그 인간의 핏줄이기에 어린 아기인 나를 향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 그래서 차라리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나만 없었다면 그 결혼생활을 끝낼 수도 있었으니까.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왜 더 이상 묻지 않았을까?
일단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엄마는 재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확인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내가 더 행복해질까? 아니면 반대로 불행해질까? 지금에 와서 왜 나를 그렇게 했느냐고 누군가에게 토로를 할 것인가? 그러기엔 나도 지금 잘 살고 있다.
잘 살고 있다고? 그럼 나는 왜 잘 살고 있을까? 흉터에 대한,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일까? 하지만 화상에 대한 기억만 없지 그 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한 상처는 가득하다.
내가 그때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그냥 죽은 것으로 끝났겠지만 아버지든 엄마든 그 당사자는 그에 대한 벌을 받았을 거다. 난 그때 죽었어도 괜찮다. 어차피 죽어버린 건데 뭐 어쩌겠나.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서 그 역시 괜찮다.
누군가를 살해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뉴스를 종종 접한다. 자신이 범죄자가 된 이유가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고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전해진다. 정말 그래서 그런 걸까? 난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 환경의 만족스럽지 못함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 행복하지 못함에 대해서 어떤 핑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만 아니면 난 정말 행복하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삶이 나아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정말 그럴까?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 중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조금은 더 약하게 학대를 받아서 그런 걸까? 너는 10대를 맞았고, 다른 너는 9대를 맞고 자라서 차이가 나는 걸까?
내 몸에 지니고 있는 흉터는 어떤 차원으로는 수치스러운 상처가 될 수 있고, 어떤 차원으로는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훈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그 상처와 사건과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 난 흉터가 자랑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수치스럽지도 않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한 상처지만 어차피 그것을 되돌릴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자랑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의 차원을 넘어서서 내게 유익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태도의 전환이다. 달콤한 사탕은 달콤한 맛으로 내게 유익을 주고, 쓴 약은 치료나 건강함으로 내게 유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쉬운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쉬운 차원의 영역이면 굳이 이런 내용을 쓸 필요조차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하든지 그 흉터든 상처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대로 끝까지 존재한다는 것. 설령 내가 그 일로 분노하고 복수의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것으로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흉터든 상처든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흉터든 상처든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방향이든 방법이든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에 발목 잡히는 것보다는 내게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