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몸에 흉터가 있다.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지는 화상 자국이다. 40년이 넘도록 흉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제법 심한 화상이었나 보다.
한 번은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할머니, 내 종아리는 왜 이렇게 생겼어?"
종아리 피부가 매끈하지 않고 뭔가 무늬가 된 것을 보고 말한 거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있는 상처는 고개를 홱 돌려야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내가 쉽게 볼 수 있는 종아리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할머니는 모른다고 했다. 그냥 갓난아기 때 연탄아궁이에 빠져서 화상을 입어서 그랬다고 하셨다. 자세한 건 말씀하지 않으셨다.
분명히 뭔가 알고 계시는 게 아닐까?
'연탄아궁이에 빠졌다고? 그것도 갓난아기 때? 그게 말이 되나?'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내 고향 군산에는 그런 일본의 다다미식 집이 꽤 많다. 지금도 군산은 그런 집들로 유명하다. 마치 관광시설처럼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새롭게 단장되어 게스트 하우스로 꽤 많이 생겼다. 그와 같은 전통 일본식 집 구조 탓이었는지 부엌 한쪽 구석에 연탄을 넣는 아궁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탄아궁이가 마루로 된 주방 귀퉁이에 있었다. 꽤 깊이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어서 연탄을 갈아 끼울 때에는 성인이 상체를 마루 아래로 숙여서 집게로 연탄을 집어야 했다. 평상시에는 마루 무늬의 덮개로 덮어 놓는다. 그래서 그곳에 아궁이가 있는 줄 모른다. 그냥 나무 무늬의 주방 바닥인 셈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평소에 뚜껑이 덮여 있다는 것이다. 아기가 엎드려 기어가서 그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초등학교 때에도 그 집에 살았기 때문에 난 충분하게 알 수 있다. 그건 그냥 사고로 일어날 일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날 엄마 대신 키워주셨던 할머니는 그 사건의 비밀에 대해서 말해주시지 않고 결국 돌아가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엄마와 헤어진 지 25년이 지나서 난 다시 엄마를 만났다. 결혼을 앞두고 적극적으로 찾아낸 결과다. 오랜 이별의 아픔과 시간들을 다시 되새기고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한참 보내고 나서 난 내 흉터에 대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이때만 해도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엄마, 내 엉덩이하고 종아리에 있는 화상 자국은 어떻게 된 거야?"
엄마는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 게 있어? 잘 모르겠는데, 애기 때 그런 건가?"
그 지점에서 대화는 끝났다.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냥 정말 모르시나 보다 했다. 모른다고 하는 사람에게 더 질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또 흘러 나도 부모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내 몸의 흉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가 되고 처음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아주 조금 긁힌 자국만 있어도 금세 알아챈다는 것이다. 체온의 변화가 조금만 있어도 알 수 있다. 매일 안아주고 뽀뽀해주기 때문에 금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흉터의 비밀은 뭘까?’
-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