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있나 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정말,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아이였던 나는 그 질문을 밤마다 되뇌었다.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 그랬다.
다음 날 아침, 깨진 유리조각과 부서진 문을 보면 질문은 더 커졌다.
그 폭력이 내게로 향했을 때는, 질문을 질문으로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두운 터널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시간엔, 희망의 언어가 들리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소용이 없다.
“괜찮아질 거야. 다 지나갈 거야.”
그 말은 그때의 나에겐 배부른 소리였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고통이 있지만, 자기 고통이 가장 아프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아무에게나 “괜찮아질 거야”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뭐, 죽기야 하겠어.”
책임감 없어 보이는 말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마저 용기가 필요했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에도 살아남았고,
열 명의 새엄마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살아남는다는 건 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기술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는 질문이 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탈출한 엄마는 왜 나를 두고 떠났을까?'
'그 집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그 집에서 더 약한 아이는 왜 두고 갔을까?'
아마도, 자식을 두고 떠나는 일은 엄마에게도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된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는 더 일찍 자유로웠을까.
자식을 버리는 고통도, 겪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 두 딸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글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조금은 덜 외로워지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삶은 두 얼굴을 가졌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만큼 보기 싫은 얼굴,
그리고 놓고 싶지 않을 만큼 매혹적인 얼굴.
나는 그 두 얼굴 사이에서 오늘도 산다.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