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마법의 주문이 있다.
나에겐 마법의 주문이 있다.
하하하, 난 새엄마가 열 번 바뀌었어
정말 뜬금없는 고백이다. 그다지 자랑스럽게 할 대사도 아니고, 감동이 있는 내용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경계심이 생길 수도 있는 발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렇겠지만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상처를 받았거나, 아니면 이혼이라는 사건이 인생에서 벌어지거나 아니면 부모의 이혼을 바라본 누군가에게는 어느 정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주문이다. 그렇게 친엄마를 포함해서 난 11명의 엄마가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바로 대한민국의 이혼율이 50%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공식적인 통계에 담긴 비율이 그 정도라면 아마도 실제로는 더 높을 것이다. 심지어 "4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런 대사로 유명한 가정문제와 이혼을 콘텐츠로 삼은 전문 드라마 시리즈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우리는 관계의 문제, 깨진 가정의 문제 속에 있다. 인구의 반 이상이 이 문제의 피해자라는 의미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흔해 빠진 이혼이나 가정 내에서의 상처의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영역에서 무뎌지는 건 아니기에 더 그렇다. 예전에는 이혼을 했다는 것이 큰 흠이었고, 현대에 와서 "그게 뭐 어때?"라고 말하는 분위기라고 해서 그로 인해 얻은 감정적인 결핍이나 상처들마저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서른 살에 결혼을 해도 100세 시대를 고려하면 70년을 같이 살아야 한다. 어떤 면으로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지만, 반드시 한 사람과 70년을 살아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이 내용으로 어쩌면 오해를 받을지 모르겠다. 이혼을 적극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차원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했다면, 아니 혹시라도 정말 못된 상황에서 이혼을 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책임은 져야 한다. 무작정 내가 원해서 결혼하고, 또 내가 싫어서 이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한 불합리함도 각오해야 한다. 제일 큰 리스크는 자녀 문제인데, 그 아이들이 감당할 아픔이든 시련이든 그 또한 당사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핵심은 가정에서의 관계의 문제가 어떤지, 이혼을 하면 되느니 마니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생각과 자세와 태도를 취하는 지다. 자녀의 입장으로, 한 인간의 입장으로, 그 일의 실제적인 이해 당사자라면 과연 난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고, 또 어떻게 그들을, 또 삶을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실제로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하려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미간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별거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누구는 자기가 더 힘들었노라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그냥 어느 누군가의 흔하지 않은 경험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랬구나"
"그랬다더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에 대한 해답은 사실 없다. 어떤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그리고 내 마음 상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꼭 그런 가정환경이나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이런 생각을 주고 싶다.
"부모와 상관없이 난 괜찮은 사람이구나."
"어떤 환경과 상관없이 내 삶은 그래도 괜찮은 삶이구나."
"내 삶은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