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바꾸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중요하게 여기면 무거워진다. 매번 진지하고, 매번 심각하고, 매번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지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말했다. “춤을 출 수 없는 신은 믿지 않겠다(I would believe only in a God that knows how to dance).”
삶이 춤이라면, 생각 바꾸기도 춤이다. 완벽한 춤은 없다. 발을 헛디디고, 박자를 놓치고, 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춤이다. 그리고 춤은 즐거워야 한다.
당신은 생각을 바꾸면서 춤추고 있는가,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는가.
부정적 생각이 올라왔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 또 실패했네. 역시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오, 흥미롭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구나. 좋은 경험(데이터) 하나 얻었다.”
심리학자 캐롤 드웩은 실수를 “아직 모르는 것(not yet)“으로 본다고 했다. 실패가 아니라 학습의 기회.
과학자에게는 실패한 실험내용도 논문이 된다.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발견이다. 데이터는 데이터다. 좋은 데이터와 나쁜 데이터가 따로 없다. 모두 무언가를 알려준다.
생각 바꾸기도 그렇다. 어떤 건 효과 있고, 어떤 건 소용없기도 한다. 모두 데이터다. 실수도, 실패도, 넘어진 것도. 모두 배울 것이 있는 데이터.
“또 실패했네”가 아니라 “또 배웠네.”
부정적 생각이 올라올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 반응을 한다.
하나는 싸운다. “이런 생각하지 마! 나쁜 생각이야!” 다른 하나는 받아들인다. “맞아, 나는 정말 그래.”
하지만 세 번째 방법이 있다. 호기심으로 관찰하는 것.
“오, 또 이 생각이 왔네. 반갑네, 이 생각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즈(Steven Hayes)는 수용전념치료(ACT)에서 이것을 “창조적 절망(Creative Hopelessness)“이라고 불렀다. 생각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관찰하는 것.
어린아이가 개미를 관찰하듯이. 판단하지 않고, 호기심 가득하게. “오, 이렇게 움직이네. 재미있다.”
생각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오, 이 생각은 아침에 더 강하게 오네.” “이 생각은 피곤할 때 더 자주 오네.” “이 생각 뒤에는 보통 이런 감정이 따라오네.”
관찰하다 보면 재미있어진다. 생각이 얼마나 패턴화 되어 있는지. 얼마나 예측 가능한지. 마치 날씨처럼.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웃을 수 있는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실수하는 모습을, 어설픈 모습을 보고 웃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자책한다. 조금만 부족해도 비난한다.
하지만 작가 앤 라모트(Anne Lamott)는 말했다. “웃음은 가장 저렴하고 가장 효과적인 경이로움이다(Laughter is carbonated holiness).”
자신의 실수를 보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유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연민이다.
“아, 나 또 실수했네. 그럴 수도 있지. 하하.”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도 배웠다. 며칠 전, 부정적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 완전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빠져 있었네.”
예전 같았으면 자책했을 것이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하지만 이번엔 웃었다. “이런 실수를 했지만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지? “
웃으니까 가벼워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생각을 바꾸는 과정에서 작은 발견들이 있다.
“아, 나는 이럴 때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오, 이렇게 하면 조금 나아지네.” “신기하다, 이 패턴이 어릴 때부터 있었네.”
이런 작은 발견들이 즐겁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Flow』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을 관찰하다 보면 계속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몰랐던 패턴, 몰랐던 연결, 몰랐던 나.
“와,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신기하다, 이게 연결되어 있었네.”
이 발견의 즐거움이 과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의무가 아니라 탐험이 된다. 노력이 아니라 모험이 된다.
어린아이는 놀면서 배운다.
블록을 쌓다가 무너뜨린다. 울지 않는다. 웃는다. 그리고 다시 쌓는다. 다르게 쌓는다. 또 무너진다. 재미있다. 또 쌓는다.
이것이 놀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틀려도 괜찮다. 무너져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되니까.
생각 바꾸기도 놀이처럼 할 수 있다.
“오늘은 이 방법을 실험해 볼까?” “이건 어떻게 될까?” “만약 이렇게 하면?”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콧(Donald Woods Winnicott)은 말했다. “놀이 능력이 있는 곳에 창조성이 있다.”
진지하게만 접근하면 경직된다. 하지만 놀이처럼 접근하면 유연해진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번엔 이렇게 해볼까?” “저번엔 안 됐는데, 조금 다르게 하면?” “실험 삼아 해보자.”
놀이하는 마음으로.
완벽하게 생각을 바꾸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과정을 즐기는 것이 목표인가.
둘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이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면 재미가 없다. 재미를 추구하면 완벽하지 않다. 더구나 완벽이란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심리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의 "긍정 정서 확장-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
긍정적 정서를 느낄 때, 우리의 사고는 확장된다. 더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더 잘 배운다.
반대로 부정적 정서를 느낄 때, 사고는 좁아진다. 경직되고, 창의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실제로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완벽하게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보다.
완벽함을 내려놓고, 재미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역설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늘 목적지를 생각한다.
“생각이 바뀌면.” “불안이 없어지면.” “행복해지면.” 그때 좋을 거라고.
하지만 Chapter 18에서 배웠듯이, 도착은 없다. 평생 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영원히 즐길 수 없다. 목적지에 도착해야 행복하다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선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가기 전에 이미 거기 있다(Before you go, you are already there).”
지금 이 과정이 목적지다. 지금 이 순간이 도착이다. 지금 여기서 즐기지 못하면, 어디서도 즐길 수 없다.
생각을 바꾸는 과정, 알아차리는 순간, 재해석하는 순간, 질문하는 순간, 넘어지고 일어나는 순간. 이 모든 순간이 목적지다.
완벽해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목표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도 여전히 진지해질 때가 많다. 실수하면 자책하고, 넘어지면 좌절하고, 완벽하려 애쓴다.
하지만 조금씩 배우고 있다. 웃는 법을. 가볍게 보는 법을. 즐기는 법을.
이 책을 쓰면서도 그랬다. 완벽하게 쓰려했다. 진지했다. 무거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각했다. “아, 이것도 실험이구나. 놀이처럼 그냥 편안하게 해 보자.”
그랬더니 조금 가벼워졌다. 조금 재미있어졌다. 완벽하지 않지만, 괜찮다.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때로 진지하고, 때로 가볍고. 때로 무겁고, 때로 즐겁고. 그 모든 것이 과정이다.
완벽하게 즐기지 못해도 괜찮다. 가끔 즐기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변화가 생긴다.
시작했고, 지속했고, 넘어졌고, 일어났고, 함께 갔고, 의미를 찾았고, 과정을 즐기고 있다.
너무 진지하지 않기. 실수를 데이터로 보기. 호기심으로 관찰하기. 자신에게 유머 갖기. 작은 발견을 즐기기. 놀이처럼 실험하기.
이제 PART 5로 넘어간다. 일상에서의 실천. 구체적으로, 매일의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함께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