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관계는 변화하고 진화할 뿐 악화된 것이 아니다.
나는 2020년 중국 상해에서 생명에 위험을 가져올 만한 큰 병에 걸렸다.
대동맥 박리라고 대동맥이 안에서부터 층층이 찢어지는 병이었다.
촌각을 다투어 즉시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니 골든 타임에 응급수술을 받는다 해도 생명의 보존을 장담하지 못하는 무서운 병이다.
운이 좋게도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데도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상해의 큰 병원 응급실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에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상해의 연안고가 도로도 그날은 유난히 한산하여 내 앞에 길을 열어 주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여 진통제를 좀 달라고 했다.
그 순간에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진통제라는 중국어 단어가 어떻게 떠올랐는지 지금도 신기하다.
진통제 탓인지 고통 때문인지 정신이 혼미해져 갔고 누군가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뭔가 한 움큼의 서류뭉치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나중에 퇴원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 의료기록을 떼어 보니 수술동의서에 내 사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만난 내 주치의는 대동맥 박리 수술에 관해서는 중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응급실에서 긴급 수술을 받고 3일 간 의식이 없었고 총 18일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회복을 하여 지금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도 대형병원에서 6개월에 한 번 추적 검사를 받는데 한국 주치의는 지금도 중국의사가 수술을 너무 잘했다고 한다.
한국 의사였어도 이 정도로 수술을 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의료 수준이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막연히 확신한다.
나도 그랬다.
내 가슴에는 수술을 받은 흔적이 목아래에서부터 배꼽 위까지 길게 나 있다.
가슴을 완전히 열었던 것이다.
한국에 귀국하여 처음 대형병원에 가서 가슴을 열어 보이며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였으면 이렇게 흉하게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겠지요?"
의사는 말했다.
"아닙니다. 이 수술은 수술 이후의 상황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어서 무조건 가슴을 최대한 열고 하는 게 맞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사들이 했어도 별 차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고 나니 보따리 돌려 달라고 했다고 목숨을 구하고 보니 수술 자국이 좀 덜 흉했기를 나는 바랬으나 그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크고 인구가 많아 전반적인 의료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의사들이 수술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 같이 위중한 환자를 살리는 의술을 가진 의사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의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돌이켰다고 어디 가서 중국의 의료 수준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난이도 높은 수술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존재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중국의 교육 시스템이 사회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획일적이고 일방적이어서 인재 배양에 적합하지 않다고 우리는 비난하나 한편으로는 딥식의 량원펑 같은 창의적인 천재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평소에 중국을 다녀온 주변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때에는 특별히 더 근거를 가지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 그래도 한국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이해나 정보가 편향된 경우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을 조금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말은 그들의 오해나 편견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봐라 중국에 오래 있었던 내 주변의 누구도 나랑 똑같이 말하더라 같은 식으로 우리의 경험과 중국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이해의 근거로 오용되는 일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중국에 대해서는 결코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내 짧은 경험만 가지고 중국은 이렇다는 일반화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중국의 모습에만 집착하여 팩트나 중국의 진의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바람대로만 중국을 바라보며 그들이 내가 알던 모습과 다르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한중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멈춰 서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두 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성숙한 변화와 역동적인 진화에 주목하여 함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산후조리원 동창이 30여 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 만났는데 서로 기억도 못하는 산후조리원 시절의 추억만 이야기하자면 함께 미래를 도모할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