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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Dec 16. 2022

창작의 '끔찍한' 고통

놀지 않는다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고 하면 친구들은 부러움에 찬 눈길을 보낸다. 캐나다의 이미지가 워낙 좋기도 한 데다가 아직 막연한 환상을 가질 만한 국가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한국이란 사회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으니 당연한 시선이라 생각한다. 특히나 내 나이는 수순대로라면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지 이년차 즈음에 접어들었을 터. 드물지만 자신의 고생을 치하하고 여기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선 시기심이나 공감의 단절을 겪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이삼 년간 수험생이었을 시절 모든 공간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경험이 있으므로 굳이 그 간극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게다가 이곳에 온 목표는 가족에게도 숨겼으므로 그런 오해를 들어도 내 탓이라 할 말 없는 것도 사실이고. 오히려 대로변에서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있다 : 야, 걱정 마! 난 충분히 고생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집도 차도 없는 제2외국어 사용자로서 캐나다에서 살아남기란 아주 힘들고 재미없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과 같다. 속칭 ‘노가다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시간이라도 투입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날이 갈수록 비어 가는 내 잔고는 대체 무슨 꼴인가. 경험자들이 모두 지적하듯이 목표를 간단히 잡으라는 말대로 나는 시간이 갈수록 선택과 집중을 행하고 있다. 워킹도, 이제는 홀리데이도 적당히 그만두고 가장 근원적인 목표인 창작에 매진한단 뜻이다. 때문에 내 생활 반경은 집-도서관, 도서관, 외출했다면 또 근처의 도서관으로 좁혀졌는데, 내가 토론토 시내의 공립 도서관을 거의 다 돌아보는 동안 이야기의 뼈대는 매일매일 갈아지고 엎어지길 반복하니 미칠 노릇이다. 이백 편이 다 되어가도록 요약만 남은 논문들의 잔해는 또 어떻고.


근처에 바다가 있고 햇빛도 있던 시절의 Toronto Public Library Beaches 지점. 차라리 이 시절이 그립다


벽이라면 뚫고나 가지

영미권에서는 창작의 고통을 Writer’s Wall에 빗대어 표현한다. 자소서든 당장 내일 내야 할 과제든 급한 원고든 써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백지를 마주할 때의 공포를. 그러니 희고 거대한 벽에 온몸을 으스러뜨리며 자신을 부딪히는 마음이야 어떨까. 다만 내 입장은 조금 다른데, 작가의 벽이 ‘이다음 스토리를 어떻게 이을까’의 고민이라면, 이쪽이 처한 상황은 재료가 널린 허허벌판에서 도시국가를 이룩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에 가깝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은 중세 유럽이든 무협 배경의 중국 대륙이든 21세기 한국이든 전부 휘황찬란한데 나 혼자 SF찌꺼기와 작법서 덩어리를 들고 원시인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차라리 지금이 시놉시스를 땜질하며 골머리를 앓는 장면이라면 덜 울고 싶을 거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고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지칠 때마다 유일하게 남은 취미인 필사를 하며 몇 번이나 따라 적은 글귀다. 관광조차 부담으로 남은 지금, 밥도 제대로 안 들어가고 가끔씩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데다가 예전만큼 아무 생각 없이 운동에 매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읽는 것과 단순히 따라 쓰는 것만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취미 하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도 CN타워 유리창 앞에서 느낀 메스꺼움과 카사로마에서의 초조함은 기억한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이야기의 틀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득바득 부둥켜안은 통장잔고와 어쩌면 빈 손으로 돌아갈 미래,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다운로드한 게임과 결국 접속하지 못한 며칠째의 기록... 우울한 이야긴 그만 하자.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더 이상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건 상상보다 더 슬프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어쨌건 위인도 저런 이야길 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완벽하겠는가. 그러니 나도 늦은 시간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이러다 보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손으로까지 써지면 더 좋고!


착각으로부터

내가 글 좀 써 볼까 하는 생각을 의식적으로도 하기 전부터 전공 수업 등으로 작가들의 정신과 그에 대한 당사자성 자학은 심심찮게 들어왔으므로 나 또한 우리 같은 작자들이 얼마나 불만 불평 삐딱선으로 가득 찬 인종인지 잘 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세상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 힘과 영향력이 있어도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 말과 행동이 어처구니없게 다른 사람 등등. 심지어는 자만으로 가득 차야 책을 낼 수 있다는 뼈 섞인 농담도 존재한다.

토론토는 비행기가 굉장히 낮게 나는 곳이다. 때때론 집 근처에서 겨울 날씨로 말라비틀어진 공원의 트랙을 돌며 내가 인천공항 근처에 살았어도 이것보단 더 적게, 그리고 더 멀리서 보겠단 생각을 많이 한다. 그만큼 머리 위에 바로 뜬 비행기를 많이 보는데, 종종 그 아랫면이 국내 항공의 익숙한 청록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걸 볼 때면 굉장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올해 삼 월 이곳으로 이끈 그 단순한 착상, 아직까지도 실마리가 풀리지 못하고 애꿎은 도서관 책상을 두드리게 만드는 그 착상은 나를 어떻게 홀렸던 걸까.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지금조차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믿으니까. 당장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위대한 발상도 아니고 내일도 나를 다시 책상에 앉게 할 착각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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