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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Apr 22. 2023

성 요셉의 축복

마지막까지 너무한 토론토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목표와 달리 목요일은 장댓비가 내렸다. 전날인 수요일, 나를 위해 모여준 한국 친구들과 해리포터 스토어에 가자고 약속했건만. 날씨가 주는 끔찍함을 알기에 편도 한 시간 사십오 분 거리의 쇼핑을 취소하고 나는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월요일은 세금환급, 화요일은 중고거래, 수요일은 뒤풀이로 에너지가 소진된 뒤였다. 겨우 일어나 그 날치 글쓰기를 하고, 역시나 해가 안 뜬 금요일엔 짐을 챙기고, 버리고. 드디어 떠나는 토요일, 이제야 하늘이 갰다.

놀라운 일이다. 일 년 전만 해도 눈앞의 워홀에 가슴이 부풀어 원대한 목표를 세웠는데. 작가의 꿈부터 언어 공부, 미술 같은 취미와 투자, 운동까지. 설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겠냔 의문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공항에서 여전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들이부은 노력에 비해 ‘인정할 만한’ 아웃풋이 산출되지 않은 절망감에 가까웠지만. 신기하게도 상상처럼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저 21화를 적고 있었다. 어떤 지지부진에도 깔끔한 정리라든가 끝이라든가 하는 결말은 없는 법인가 보다.


인도요리라고는 카레만 알던 내게 다가온 도사(Dosa). 한국인의 밥 기준에 벗어난 음식인데 진심으로 맛있다


산 호세(San Jose), 성 요셉의 축복

도착한 그날 밤은 하필 친구의 이삿날이었다. 이전 집주인과의 트러블로 이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단다. 하긴 내 인생조차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는데 나보다 더 오랜 타지생활을 한 그녀는 어땠을까. 친구의 인도 지인들을 따라 도사를 먹고, 전등 없는 방에서 침대 조립을 지켜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의 카오스를 실감했다.

제아무리 캘리포니아라도 해가 지고 난 2월 밤은 싸늘한 법이다. 섣부른 추위에 떨며 일어난 아침, 날 기다린 것은 내리쬐는 햇살이었다. 그때 느낀 감동을 감히 묘사할 수 없다. 오죽하면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11개월 캐나다살이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 벌써 희미해진 빅토리아여, 미안. 토론토에게는 그다지 미안하지 않다. 하늘이라도 맑던가.


    

샌프란시스코의 부표가 되어

토요일, 이삿짐트럭을 몰고 나를 공항에서 데려온 후 침대까지 조립한 친구. 일요일 아침을 맞자마자 쉴 틈 없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이 시작되었다. 연초부터 예매해 놓은 알카트라즈(Alcatraz) 티켓을 확인하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칼트레인(Caltrain) 시간을 찾았다. 아, 구글맵의 만류를 들어야 했는데.

  

전날 검색해 보니 구글맵에서는 산호세부터 샌프란시스코의 경로를 무려 2시간 45분 이상으로 예측했다. 칼트레인 같은 기차를 타면 2시간 내외로 갈 수 있는 곳이기에 친구는 잠시 당황했지만 우리는 별 걱정 없이 잠들었던 것 같다. 셧다운으로 인하여 중간지점까지만 기차를 운행하는지도 모르고...

토론토의 악명 높은 교통수단 TTC에서도 전차운행중단은 간간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해당 역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때는 역 간의 이동이라면 이때는 도시 두 개를 건너야 했다. 실시간으로 알카트라즈 예매 시간이 지나는 걸 확인하며 결국 버스에서 내려 우버를 탑승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건 워홀의 유일한 유산이다. 전전긍긍하는 친구를 붙잡고 나는 발권창구로 향했다.


기차 셧다운 들어보셨죠?

   

해외생활의 팁, 온 우주의 기묘한 마력이 나를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고 절대 내가 의도한 잘못이 아니라고 어필하면 편하다. 별 핑계를 다 댄다 싶었지만 직원은 흔쾌히 일요일 티켓을 화요일로 바꿔 주셨다.     


알카트라즈(Alcatraz), 통칭 감옥섬.


스스로의 진상력에 감탄하며 시도했다만 정말로 어리광을 들어줄지 몰라 감탄한 우리. 이왕 남은 시간 피어 39(Pier 39)를 실컷 구경하기로 한다. 흔해빠진 기념품 가게부터 오로지 자석만 판매하는 가게, 반려동물 용품 가게, 왼손잡이를 위한 가게나 그 자리에서 이상적인 인형을 만들어 옷까지 입히는 가게까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대도시 문명인가 싶은데, 마지막 가게는 미국에 보편적으로 있단다.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친구도 저런 가게에 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는데, 나로서는 최신문물을 접한 기분이라 그림의 떡이기만 했다.


자기 동네는 재미없다고. 친구 왈, 샌프란시스코 관광이 이렇게 재밌는지는 몰랐단다. 빅토리아에서 반년을 보냈던 나로서도 섬 생활이 지루했기에 남의 눈에도 내가 저랬겠구나 싶었던 대목이었다.

끝없는 오르막길을 걸으며 45도에 이르는 경사 아래 위치한 바다를 보고,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광장 앞 딤섬을 음미했다. 다이소가 그리운 재팬타운에서는 영어로 쓰인 만화책을 보며 추억에 젖었다. 타코야끼와 버블티를 먹으며 일몰을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밤. 빅토리아에서 근근이 일하고 록키산맥을 갔을 때는 노동을 정리하는 후련함과 뿌듯함이었는데 토론토의 사 개월을 정리한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어땠던가. 시행착오와 먹구름으로 넌더리가 난 생활에 겨우 들어온 햇빛을 맞으며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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