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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Jun 02. 2023

돌아가는 길

11개월을 마무리하며

결국 써야 한다

글을 쓴단 명목으로 북미 대학 도서관을 다섯 개는 돌았다. 맨 처음은 빅토리아 대학교-게스트 와이파이가 가끔 끊겨서 당황하곤 했지만 자연에 파묻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다. 가끔 비가 오면 사슴이 돌아다닌다-, 두 번째는 요크 대학교-캐나다 도서관의 특징일까. 아무도 외부인의 출입을 막지 않는다. 덕분에 모던한 건물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창작욕구를 채웠다. 폭설이 온 날엔 깜짝 놀랐지만-, 세 번째는 토론토 대학교-어쩌다 다운타운으로 나가는 날이면 이용했다. 세계적인 명문대학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도심에 있어 낭만은 덜하다-, 네 번째는 산 호세 주립대학교-친구의 수업날이면 도서관을 이용했다. 미국은 밤이 되면 출입자를 검사한다! 덕분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떨었다-, 그리고 이용하려다 실패한 밴쿠버 대학교캐모선 칼리지 랜스돈 캠퍼스. 전자는 시간의 한계 상, 후자는 어째 개강을 늦추길래 못했다.

눈치챘는가? 산 호세에서도 결국 쓰는 걸 멈출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갑작스러운 면접과 약속, 강의로 친구가 바빠서 다행이었다. 그동안은 내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 글의 결과도 미래도 모른 채 단지 하루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목표에 사로잡혀 남의 대학을 전전하고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맞던 나날이란.


참고로 산 호세 주립대 앞에는 신기한 조형물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거.


그럼에도 꿈은 어딘가 희망적인 면이 있다. 지나버린 시간이 아쉽다거나 아깝다기보단 나조차 모르는 힘으로 어떻게든 타자를 쳤으니까. 덧붙여 지금은 오천 자 분량의 오십 화가 비축된 상황인데, 퇴고를 할 때면 지난날 추억이 떠오르는 게 참 씁쓸한지 그리운지 형언할 수 없게 묘한 감정이 밀려오더라.




마지막 만찬

멋진 차와 넓은 아량의 소유자 R에게 감사를. 친구의 룸메이트 N은 마침 휴가를 냈고, 우리는 내 마지막 밤을 축하한단 명목으로 랍스터를 먹으러 떠났다. 실리콘 밸리의 물가는 도착 전부터 전전긍긍하던 소재였다만 어째 체감 엥겔지수는 캐나다가 훨~씬 더 높았던 덕분에 환전해 간 달러도 넉넉히 남아 가장 비싼 플래터를 시켰다.


한국인들의 인도인과 중국인에 대한 단상은 잠시 접어두고-여담이지만 인구와 땅덩어리 차이 때문에 아마 국민 간 간극은 절대 좁힐 수 없다고 생각한다-북미에서 만난다면 의외로 빨리 친해지는 인종은 두 나라 국민인데, R과 N모두 인도 이민 2세라는 배경이 있어 나눠먹는 시간은 정말로 정다웠다. 깔끔한 식사를 지향하던 내가 화들짝 놀랄 만큼 정 없던(?) 캐나다 식문화에서 탈출하고 나니 얼마나 친밀하게 느껴지던지. 사이좋게 블루베리 에이드를 마시고, 감자칩을 클램차우더에 찍어먹고, 통째로 나온 랍스터 꼬리에 낑낑대고 웃다가 N이 사준 굴을 얻어먹으며 밤은 아름답게 흘러갔다.


(나름)싸다! 맛있다! 좋다!


게다가 쾌남 중의 쾌남 R, 여자친구의 친구의 마지막날인 만큼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단다. 랍스터 마켓에서 조금 달려 도착한 야경은 감상적으로 변하기에 충분했고, N이 보여준 회사의 호수는 실리콘밸리식 건축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N, 어째서 연차휴가를 받고도 자사 야경을 보러 간 거냐... 그의 공대 너드력에 다른 의미로 감탄도 했지만.

R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원이 야간 입장을 제한한 탓에 마지막 외출은 싱겁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씨와 산 호세의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있으리라 확신한다. 일주일짜리 만남에도 자기 일처럼 나서준 친절함에 감사를. 항상 실감하지만, 결국 남는 건 좋은 사람들의 좋은 추억뿐이다.          



11시간의 비행

식욕이 달아났는지 혹은 돌아가는 심정이 복잡미묘했는지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사워도우(Sour dough, 시큼한 빵)를 먹으면서도 여전히 음식은 맛이 없었다. 아, 공항 식당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서부-동부-서부 루트로 대륙을 횡단한 덕에 비행시간은 다행히도 고작 11시간. 심지어 시차 덕분에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여행일정 중에서도 공항과 관련된 모든 것 일체를 극혐하는지라 열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고민을 많이 했다. 영화라도 볼까 아니면 이북이라도 읽을까, 탈것에선 잠이 안 오는 체질인데 어떡하지 등등 고민이 무색하게 비행시간은 나의 타자소리로 점철되었다. 즉, 한 숨도 못 잤다...

사실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게 주변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법한데 요행으로 옆좌석에 앉은 건 베트남 부부. 워홀의 여파로 스몰토크만 늘어버린 탓에 기내식 타임마다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분들이 내키지 않아 보인 건 우리끼리 비밀이다만.

어쨌거나 이유도 모르고 업로드도 안 하는 세이브 원고를 쌓아놓으며, 심지어 계획만큼 많이 쓰지도 못한 겨우 만자짜리 글을 저장하며 긴 비행은 끝이 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은 누구도 슬프지 않았고 우울할 만한 일도 없었고 충격적인 사고도 없었으니... 오랜만에 본 가족은 페이스톡 덕분인지 돌아왔구나, 하는 게 감상의 전부였다면 나쁜 자식일까.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가족 또한 이사를 해 버려 몇 번짼지 새로 보는 집은 곧(또!) 이사를 앞둔 상황답게 너저분했다. 차라리 짐을 풀고 추억에 젖어있거나 눈물이라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현실이 영화처럼 극적일 이유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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