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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18. 2023

갭라이프가 되지 않게

존경하는 사람

3부작에 걸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 고백할 것이 있다. 여지껏 나는 유독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만 거짓말로 대답해 왔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게에서 자주 농담하던 E와 친했던 이유도 ‘화장실에 가면 여왕도 나도 모두 엉덩이를 깐다’는 E의 가치관에 내가 얼추 들어맞았기 때문이니 저 질문에는 어련할까.

부모님(낳아주셨으니까), 스티브 잡스(혁신의 아이콘이니까), 대충 유명한 사람(대충 유명하니까) 등 여러 가지 답변을 돌려쓰던 내게 존경하는 마음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었다. 그것도 무엇에 치이듯이 나타난 게 아니라 일하면서 스며들었는데, 바로 가게의 G이다. 워낙 오래 근무해 이미 가게의 일부였던 G는 사장님보다 더 전에 있었던 까닭에 ‘PG’(Past G라는 뜻으로, 골동품 애호가가 나타나야 팔 수 있는 유물급 재고를 말한다)라는 용어가 존재할 정도로 가게의 NPC, 걸어 다니는 튜토리얼이었다.


매일 일하던 가게의 전경. 앞으로 볼 날이 있을까?


물론 G가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단지 경력뿐만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했는데, 그녀는 소위 말하는 리더의 아이콘 같은 사람이었다. 폭풍우 치는 비수기에도 가게 대청소를 하는가 하면, 남이 힘들어할 만한 업무는 자기 선에서 처리하려 했고 비슷한 나이대의 점원들은 또 나이가 든 대로 배려하느라 몸이 부서져라 일하곤 했다. 콧노래를 부르거나 판매 물품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는 등 진심으로 가게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녀의 태도는 깊은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농담을 던질 때도 G는 다르다며 그녀의 인간성에 대해 부정적인 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같은 시프트를 받을 땐 당연히 한 시간 늦게 퇴근할까봐 꺼렸지만, 이 정도는 내 글에서 이야기해도 되겠지. 아무튼 ‘언젠가 나도 G처럼 행복하게 일을 하고 싶다’든가 ‘이 세상에 G 같은 사람도 실존하는구나’하는 생각을 안겨준 G와 그날도 11시까지 잔업을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인적 끊긴 정류장에서 G가 이런 말을 했다.


갭이어라니 정말 좋네. 나도 옛날에 나간 적 있지. 갭이어가 갭라이프가 되어 버렸어. 있잖니 K, 무조건 덜 일 하고 많이 받는 직업을 구해야 한다. 갭라이프가 되게 해선 안 돼.

갭이어는 좋지만

G는 굳이 말하자면 기념품 매장 계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사람이다. 승려라고 해도 좋다. 성실하고 희생정신에 가득 차 있으며 사회에서 원하는 도덕성을 갖췄다. 취미도 전부 건전한 것으로, 원예와 그림그리기, 피겨스케이팅 관람이 전부다. 사적인 질문은 안 되지만 가까워지기만 하면 긴 인생사를 들을 수 있는 다른 캐나다인들처럼 나는 그녀가 어떤 고난과 역경을 헤쳐왔는지도 안다. 사람은 산 대로 늙는다더니 외관도 완전히 호호 아줌마를 닮았다. 멀리서 봐도 영화에 나올 만큼 온화했단 뜻이다.

따라서 우리 이야기가 내 앞으로의 삶과 그녀의 은퇴 후 인생과 G의 과거로 흘러갔을 때, 나는 문득 G가 꺼낸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고점에 오른 장인이 괜히 투덜대는 말처럼 들려서가 아니었다. 왜, 사람은 가장 지쳐있을 때 속마음이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나는 곧 떠날 점원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다들 내게 자기 삶을 한 보따리씩 꺼내놓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터, 어쩌다 G는 그런 말을 했을까.

기억하는 대로 우리 대화를 적어본다.



G: 이번에 토론토로 간다며?

나(K): 네. 일단 가서 적응하고 집이랑 일을 구해봐야죠.

G: 멋지네. 나도 갭이어는 좋다고 생각해.


*갭이어(Gap Year): 학업 등을 잠시 중단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아 탐색의 시간을 갖는 것. ‘틈’, ‘간격’을 뜻하는 ‘Gap’과 연도를 의미하는 ‘Year’의 합성어


G: 사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갭이어를 가졌거든. (G의 오랜 정원사 경력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대학은 안 갔지.

나: 저도 갭이어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해요. 바로 대학에 가면 힘들더라고요.

G: 그런데 갭라이프(Gap Life)가 되면 안돼.

나: 나는 G가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

G: 전혀. 조금만 일해도 많이 버는 일이 가장 좋아. 그런 직업을 가져야 해.

나: G, 내가 작가가 되려고 여기 온 걸 잊었어요?

G: 내 말 잘 들어. 조금 일하고 많이 버는 게 최고야.

나: …(혹시 자기 인생을 후회하는가 생각 중)

G: 알겠지? 갭라이프가 되지 않게 해.


저 말을 끝으로 G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이후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로키산맥을 보고 오느라 내가 G를 본 날도 저날이 마지막이었다. 크기로는 남한의 4배라지만 사람들은 제주도 서귀포시 크기의 빅토리아 시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빅토리아, 그렇게 좁은 곳에서 어떻게 G를 마주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얼굴도 희미해진 지금은 오직 그녀가 남긴 말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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