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完
만다라트 계획표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자랑할 만한 면도 적어놔야 우주의 균형이 맞고 그럭저럭 내 체면도 설 것 같다. 불쑥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 사연팔이를 하려면 이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한다. 내가 돌아온 후의 이야기를 하려는 서두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입국하자마자 내가 한 것은 캐리어를 정리한 것, 다음날 한 일은 취업 지원 센터를 방문한 일이다. 퇴근 후 글을 쓸 수 있도록 사무직 몇 군데에 지원서를 넣고, 몇 군데의 면접을 보고 여전히 글을 썼다. 가족의 이사가 겹치는 바람에 시간을 들여 정리를 하고 영어 자격증 시험을 세 번 보고 다른 자격증을 또 따고. 마음을 고쳤어도 쓴 건 아까워 공모전에 몇 차례 지원하고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고 다른 자소서를 쓰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떨어진 게 더 많았다. 부업을 위해 지원한 회사니 태도에서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고시만큼 익숙하지 않은 공부가 맞을 리도 없고 연재하는 동안에도 반응이 전무했는데 공모전이 될 수가 있나. 다만 신기할 정도로 후련해서 드디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얻어맞았거나 드디어 내 나이에 걸맞은 사고를 하게 된 것 같다.
물론 그 이유 또한 안다. 화창한 빅토리아를 겪고 나서 도착한 토론토가 지옥처럼 음울해서 깨우쳐 버렸다. 오후 다섯 시까지 키보드를 만지지 못해 바닥에 등을 말고 누워있다가도 깨어나던 나를 보고 확신을 얻었다. 나는 하루에 만 이천자를 쓸 수 있고 햇빛이 없더라도 영양제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온실 속 화초 그 자체였지만 어떤 금전적 지원 없이 생계를 꾸렸다. 머리가 굳는 게 무서워 화장실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아침저녁으로 영문법을 공부하고 매일 운동을 했다.
무엇보다 언젠가 구석에서 찾았던 종이를 기억하기에 나를 부정하지 않겠다. 야구선수 오타니의 계획표로 유명해진 아홉개의 아홉개짜리 네모, 만다라트 계획표를 나도 만들었었다. 작문뿐만 아니라 소재 모으기부터 체력 기르기, 태도 갖추기처럼 인성 관련 부문까지 빼곡히 적어놓고선 떠나는 날에야 발견했다. 나는 그 64칸 중에서 몇 개를 해내고 있었을까.
아무도 갭을 정의하지 않았기에
정답은 ‘전부 다’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나는 나와 한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는 알았어도 그 정도로 노력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종이를 봤을 때 새삼 충격을 받았다. 몇 번을 필사하고선 까맣게 지워버린, '꿈을 위해 인생을 갈아넣지 말라'는 구절을 읽으며 어떠한 선택을 해야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작가였는지, 작품을 쓰길 원했는지 혹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질문의 형태였다. "실패하고서도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여기서 실패란 자소서 경력 칸을 채울 수 없다는 의미니까 위로는 넣어두시길 바란다.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논문 수백 개와 인물관계도와 구현된 세계관을 정리하며 언젠가 뽑아 쓸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독립하고 다시 돌아와 부모님께 얹혀살고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내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미 떨어진 공모전에 이렇게 다시 글을 제출하는 까닭은.
어떤 사람들은 워킹홀리데이를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사실은 시민권도 따기 힘들고 사기를 당하거나, 운이 좋아도 홀리데이를 즐길 여력이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즉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언어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본 경험뿐으로, 이 또한 자기 노력에 달렸다.
다만 나는 자기 통제감을 얻었는데, 이상하게 이 감각은 손에 넣고 나면 다시는 잊히지 않는단 특징을 가진다. 꿈이야 바뀔 수 있다. 게다가 나는-내 포장 능력을 활용한다면-꿈의 변경이 아닌 꿈의 재확인이므로 어쩌면 공부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메시지를 전파할 수도 있다. 골방에서 타자를 칠 때보단 주변인의 시답잖은 일을 도와주며 더 생기가 돈 나로서는 이편이 적성에 맞는다고도 생각한다. 꿈을 위해 인생을 갈아 넣지 말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그 반대 또한 동의한다. 어차피 각자의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준 명언이다. 어느 하나가 맞을 때 반드시 다른 하나가 틀리는 건 세상의 이치에도 어긋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며, 내가 준비하는 것이 다시 실패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인지 지금 걱정해봤자 에너지를 깎는다고 경험으로 깨달았다. 직접 적는 건 역시 슬프지만.
이상기후 때문에 한국보다 따뜻한 줄 알았더니만 걸핏하면 폭설이 내리던 토론토의 겨울, 심야에 눈을 밟으며 계속 G를 떠올렸다. 집을 뛰쳐나오고 본 인생엔 저마다의 굴곡이 있었다. 나조차 오십명 넘는 인물의 결말을 미정으로 남겨버렸으니 내 인생은 오죽할까. 돌아온 지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면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다.
다만 굴곡은 갭이라느니 간격이라느니 빈 곳이 아니다. 현대과학도 아직 완벽한 진공을 만들지 못했는데 일개 일반인이 삶을 공간으로 남길 수 있을까. 그래서 G에게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 그녀의 인생은 누가 봐도 꽉 차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딸의 손을 잡고 피겨와 크리스마스 시장을 구경하러 다니고 일이 끝나면 테라스의 작은 정원을 가꿀 것이다. 은퇴를 앞뒀으니 곧 마을 아이들을 위한 그림 수업을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런 생활을 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의 생활도 갭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때로는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때로는 두시부터 열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공부했다. 꼬박꼬박 글을 올렸고 혼자서도 바깥을 돌아다녔다. 도서관과 실업급여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토론토에서도 접시를 나르고, 온몸에 호랑이 연고를 바르고, 잘리고 나서도 논문을 읽고. 내가 갭라이프라고 따끔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정작 돌아와서가 아니었을까. 완벽하게 자기 통제감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일어나서 이불을 갠다. 아직 이삿짐을 정리하지 못했다. 세탁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야겠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다시 내 손으로 요리해 먹으면 오늘을 사는 기분도 미래를 향한 희망도 옛날에 잊어버린 꿈도 부활할지 모른다.
사견이 길었다. 여태껏 내 에세이는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써도 되는 것만 열심히 걸러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도록 만든 포트폴리오에 가까웠다. 특히 빅토리아까지의 생활은 어떻게든 짧은 책으로서 완결을 내기 위해 억지로 맺음말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가장 보람찬 여름을 지나 공적인 문서에 적을 내용이 없는 겨울을 겪고 왔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해가 날 때까지 덕분에 많이 걷고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언젠가의 나를 위해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