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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Feb 28. 2023

즐기는 데도 연습이 필요해

감정은 나의 몫

그건 한 통의 문자에서 시작되었다. 빅토리아에서 인연을 쌓았던 사장님 D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겨울에 어떤 행사를 참석한단 소식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토론토였을 줄이야. 방문하는 김에 밥을 사주고 택시까지 태워 보내주겠단 제안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때는 마침 12월의 시놉시스 완성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한숨으로 새해를 보내던 시절. 스토리 라인을 잠시 미뤄두고 사흘 치의 연휴를 즐기던 나는 덜컥 답장을 보냈다. 어쩌다 찾아온 만남을 위해 1월까지 십만 자 이상의 분량을 쓰겠단 또 다른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정말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첫 주엔 한두 화 분량을 쓰고, 둘째 주 차엔 갑자기 여덟 개를 채우고, 셋째 주엔 누적 십이 화를 쌓고. 마침내 마지막 주엔 남의 대학 도서관까지 전전하며 열여덟 화를 완성했다. D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스테이크를 썰 생각으로 어찌나 마음이 떨렸던지.     


아름다운 자태

우리는 수다를 떨고, 밥도 먹었다. 올해는 빅토리아 시에서 마음먹고 항구를 꾸민 덕분에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십이월을 보냈다는 이야기, 심지어 새 직원-D의 딸과 이름이 같다며 Work H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단다-을 뽑았다는 이야기, D의 가족이야기와 나의 별일 없는 일상을 공유하며 나는 아마 조금 어리광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창작과정이 예상보다 더 힘들어요, 돌아가면 사회에 적응할 게 무서워요, 부모님의 기대는 아직도 커요... 등등. D는 아무렇지 않게 건강하게 지낼 것과 루틴을 만들 것을 권유했다. 고기를 썰고, 택시를 얻어 타고. 추운 날씨에 얇게 차려입고 간 탓에 덜덜 떨며 돌아오는 길은 부끄러움과 후회의 연속이었다.     



무지개 뜬 나이아가라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기한도 없는 걱정을 가지고 왜 나를 괴롭히고 있었을까. 서쪽에서 동쪽으로 대륙을 가로지르며 D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 불평이 아니었을 텐데. CN타워와 카사 로마, 시청광장 스케이트, 로키산맥과 토론토 아일랜드. 행복을 눈과 귀에 담아두고 입에서 나온 말이 겨우 그것뿐이라는 게 씁쓸했다. 여기서도 버릇처럼 홀리데이는 없고 워킹만 있었다고 적었지만, 쉬는 날에도 마음이 온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었다.


그맘때쯤 나이아가라 당일치기를 계획해 놓아 다행이다.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탔던 카지노 버스가 목표지에 도달했을 때, 창가에서 본 폭포의 실루엣이란. 그 지점부터 우리는 카메라를 쉬지 않았다.


그래도 캐나다 와서 다행이야.
언니는 나 만날 때마다 그 소리 하는 거 알아?


놀랐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난 불평과 다짐을 반복하고 있었구나. 택시에서 느꼈던 부끄러움의 윤곽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불평불만, 우유부단, 압박감, 심지어는 이렇게 자학을 거듭하면서도 아름다운 찰나를 보상 삼아 변명이 될 법한 의미를 찾고 있다니.

애매한 나이, 어디까지나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 그렇게 결론지었지만, 누군가는 한 다리 건너 결혼소식을 들려주고 누군가는 사회의 진입을 완수하고 더 큰 학위를 따고 일이 년의 경력을 쌓는 동안, 나는 미련덜기의 마스터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날 본 나이아가라는 아마 내 학위수여식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내가 서너 번도 넘게 합리화를 해버렸다면, 그 순간의 나를 위해서라도 이 이상 부정적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나이야 가라~"를 했다가 일행이 피했다. 즐거웠다


관람은 이렇게, 인생은 저렇게

그럼에도 여전히 나아지지 못하는 부분은 있다. 전시회장에서 지루함에 몸을 비트는 버릇 말인데,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 방문한 온타리오 미술관에서도 그랬다. 사오 층에 이르기도 전에 일층에서 뻗어, 주변 관람객들에게 훌륭한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제목은 ‘드러누운 관광객’ 정도면 족할까.


결국에 2층 간이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내가 짜낸 계획이란 다음과 같았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걸어 다니고, 꽂힌 그림만 볼 것. 그렇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티켓의 값어치를 위해서라도 뜻깊은 시간을 보내야겠지만, 다행히도 캐나다인지라 내가 한국인인지 알게 뭔가. 한 점 한 점에 강박을 가지기보단 나중에 ‘그때 참 괜찮았지’ 소리가 나올 정도면 괜찮은 관람이다. 1층에서 훌륭한 행위예술가였던 나는, 3층부턴 훌륭한 댄서로 멋진 워크무브먼트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캐나다에선 의외로 한국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조금만 큰 공립도서관만 해도 외국어 섹션을 잘 꾸며놓았는데 그때 읽은 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선 4차원 시간개념 속의 인생을 미술관 관람으로 비유했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관람객은 우리 자신이기에 원하는 선택, 즉 같은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것. 사실 타임패러독스를 영리하게 넘겨버리는 작가의 탁월한 비유에 가깝지만, 이번 미술관행에서 그 책이 갑자기 떠올랐다. 매 순간 진심으로 임하기도 힘들고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순 없는 인생, 모든 그림에 집착하다 보면 관람은 지옥과 다를 게 없을 거다. 때로는 심호흡을 한 뒤 다섯 혹은 열 걸러 하나 있는 걸작을 향해 융통성 있게 지나가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관람을 사는 방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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