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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pr 10. 2023

연필 같은 인생

세상 나만 아픈 줄 알았지




문득 연필을 보고 인간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아파보지 않았던 기다란 연필은 참 꿈이 많다.

자긴 마음만 먹으면 뭐든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당당한 착각과 함께.


"내가 아직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시작하기만 하면 멋지고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지만 공장에서 나온 지 며칠 안 된 그 연필은 한 번도 뾰족해 본 적이 없어서

훌륭하기는커녕 아직 흑심조차 내보인 적이 없다.


어찌어찌 굴러 굴러

한 가정집에 들어와 세워둔 플라스틱 필통에 꽂힌다.

멋들어지게 쓰이려면 연필깎이에 들어가 돌돌돌 깎여야 하는데 몸이 파이고 깎여나갈 생각에 어깨만 움츠릴 뿐이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아플 것 같다.

당연하다.

살점이 듬뿍 떨어져 나갈 텐데 안 아프고 배기겠나.

게다가 두렵기도 하다. 허연 속살을 드러내야 할 것이.


그토록 두려운 필통 밖이지만 결국 주인의 손에 잡혀 끌려나간다.

그리곤 연필깎이에 쑤욱 들어가서는 둘둘둘둘 소리를 내며 살점이 툭툭 떨어져 나간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같이 지내던 몽당선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처음 연필깎이에 들어가면

무지 아플 거야.

네가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니 당연하지.

그런데 신기한 건

점차 익숙해진다는 거야.

아픔을 즐겨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 될 거야.


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가.

아픔을 즐기라니.

아파 죽겠는데 아픔을 즐기라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이미 몸은 연필깎이 구멍 안에 큼직한 세 이빨에 꽉 물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이다.


주인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를 깎다 말고 자꾸만 꺼내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다 깎였는지 덜 깎였는지 뾰족한 정도를 확인하는 거겠지.

마음에 쏙 들지 않는지 아직 뭉뚝한 나를 다시 구멍으로 쑤욱 집어넣어 또 둘둘둘둘 내 살점을 깎아내린다.


찔끔찔끔 아프게 하면 얼마나 더 아프던가.

어차피 아플 거라면 한방에 깔끔하게 날 해치워 주라고!


같은 공장에서 나왔지만 자동연필깎이가 있는 집으로 팔려 간 동기가 부러운 순간이다.

자동연필깎이는 중간점검 따위는 없다.

원 샷 원 킬!

한 번 집어넣고 자동으로 알아서 깎아준 후 "끝났어요." 외치듯 안에서 퉁 밀어내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나는 왜 금연필이 아닌 흙연필인가 억울하다.


아니다. 그래도 무늬만 연필깎이인 손가락만 하고 조그맣고 초라한 300원짜리 연필깎이에 들어가진 않았으니 은연필이라 스스로 위안 삼아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 다 집어치우고

엉덩이만 콕콕 눌러주면 톡톡 심이 나오는 샤프로 태어났다면 좀 더 우아하게 살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 뭐 어찌 되었든 나도 이제 뾰족하고 검은 심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뼈를 깎는 아니, 살을 깎는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었더니 본분을 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아픔을 참고 견디었다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아픔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부지런한 시간은 달리고 달려 나를 또, 살이 패이는 지옥 같은 구멍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할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익숙해지지 않는 생소한 고통을 내게 안겨 줄 거란 건 잘 알고 있다.


모든 연필이 아픈 것처럼

모든 사람은 아프다.


아프지 않은 연필이 없듯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당면한 고통은 제각각 모두 다르겠지만

내게 주어진 역할과 재능을 맘껏 뽐내며 나를 무너뜨릴 것만 같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사는 것도 꽤 해봄직하리라 믿는다.





*photo by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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