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놓칠세라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는다. 엄마의 빠른 걸음에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나는 보폭이 모자라 쫑쫑 뛰듯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지나는 길이 평소 길과 다름을 직감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몇 발자국 걷지 않아도 자꾸만 나타나 반짝였고, 까만 밤도 아닌데 이른 저녁의 쨍한 조명은 제각각 예쁜 언니들을 비추고 있었다. 인형의 집들만 모아 놓은 거리를 걷는 듯했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인형들은 내가 걸을 때마다 새로운 얼굴로 바뀌며 나를 쳐다봤다. 평소라면 예쁜 인형들 사이에 있는 나는 더없이 행복했을 텐데 이상하게 뭔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괜히 주눅이 들었다. 엄마와 잡은 손에 힘은 더 꽉 들어갔고 종종걸음은 더 빨라졌다.
어린 나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날 겁주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걸.
길을 빙 돌아가는 것보단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 손을 잡고 청량리 골목을 그냥 지나가신 것 같다. 길이란 건 사람이 걸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있는 길을 엄마는 그저 이용한 것뿐.
하지만 요즘 시대에 대입해 보았더니, 요새 엄마들이면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거였다. "맹모삼천지교"라고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의 이사도 불사하는 맹자의 열혈엄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좋은 곳에서 될 수 있으면 좋은 것만 보여 주며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지 아이에게 해가 되는 것은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엄마들이 더 많은 까닭이다. 세 번 이사가 대수인가. 유모차를 밀다가도 자식을 향해 돌진하는 차를 막기 위해 순식간에 유모차 앞을 맨몸으로 막아서는 초능력을 가진 이름도 거룩한 엄마들일 텐데 말해 뭐 할까.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때 왜 그랬을까.
해가 될만한 것을 보여주어도 당신 자식은 절대 엇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말 안 듣고 집 나가면 이렇게 험한 생활을 하게 되는 법이라고 나에게 으름장을 놓으시려 했던 걸까. 겁주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라는 내 예상은 조금씩 흔들리려고 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 받은 네모나고 투명한 사각 상자 안에는 미미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탁자도 있고, 여벌의 드레스와 함께 화장품도 있고, 손거울, 빗이 있었는데 예쁜 언니들은 커다란 미미 인형 같았다. 화려한 은색 의자에 짧은 치마를 입고는 자칫하면 속옷이 보일 것 같은 자세로 유리벽 안 공간에 앉아 누군지도 모를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얼핏 봐도 남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나갈라치면 예쁜 여자들의 큰 언니뻘 되는 여자가 나와 다짜고짜 남자의 팔짱을 먼저 끼고 본다. 그리곤 자꾸만 자기네 집으로 들어가자고 당긴다. 나와 엄마는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곱게 보내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저 막연히 느끼는 다행이었다만 그 당시 열 살짜리가 알 게 뭔가. 저 언니들이 왜 저기 안에서 저러고 있는지.
나는 남자가 아니니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안다.
웃고 있지만 웃음이 없고, 사랑을 하지만 사랑이 없을 거라는 걸.
당시 나의 엄마도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 역할을 하다 보니, 엄마가 처음이어서 몰랐던 거였겠지. 그런 곳을 아이와 함께 거닐면 안 된다는 것을. 모든 엄마는 처음이라 당연히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도 할 수 있으니, 그런 나의 엄마를 탓할 마음은 없다.
아마 당신이 아무렇지 않으면 당신의 아이도 아무렇지 않아 할 거라고 마음 편히 생각한 거겠지.
알록달록하고 예쁜 조명을 보면 자꾸만 그때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 인형의 집이 떠오른다.
이미 그 생활에 익숙해진 듯 그런 삶이라도 열심히 살아보려 억척같이 애쓰는 언니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내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체념에 텅 비어버린 눈을 하고 있던 여자도 있었다. 훨씬 나중에 어른이 되고서 알게 된 것인데 그곳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좀처럼 나올 수 없는 곳이란 걸 알았다. 자의든 타의든 발을 들인 여자에게 별의별 명목으로 빚을 지게 한 다음, 갚을 수 없을 만큼 원금보다 이자를 계속 불려 나가는 수법으로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과도 같은 곳이라는 걸.
집창촌*이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고는 하나, 언제든 어디서든 불법은 항상 존재하는 인간 사회.
아직도 초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짧은 치마에 긴 머리, 새빨간 입술을 한 예쁜 언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슬프게 웃고 있겠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엄마는 그때 왜 나를 데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알록달록한 그 길을 지나쳐 가신 걸까. 세상은 만만치 않은 곳이고 무서운 곳이기도 하니 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려고 미리 가르쳐주신 걸까. 딱 한 번 그곳을 걸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길을 걷지 않으셨다.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 기적 같은 생에서 잘못된 길에 들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소한 나의 눈은, 텅 빈 눈동자는 아닐 테고, 무엇이 됐건 마음먹고 의지를 불태우면 해 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상황이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