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지은 밥이 한 김 빠지면 소분해서 냉동에 넣어둔 후에는 청소기를 들고 또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밀고 다니겠지.
엄마, 할머니 세대에 비하면 밥은 밥솥이 해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니 이 편한 세상이 아니냐 할 수 있겠다만
쌀이 스스로 목욕 후 제 발로 밥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옷이 제 발로 세탁기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청소기 또한 로봇청소기가 아닌 담에야 스스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가전은 작동을 훌륭하게 해낼지언정 가장 처음 시작 단계에는 사람 손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전에 비하면 매우 수월해지긴 했으나 현재를 사는 지금 세대는 과거의 어머님 세대를 살아 본 게 아니므로 그 세대와 비교해 편해졌으니 군말 말라는 말은 솔직히 말해 피부에 별로 와닿지 않는다.
모든 가전의 시작버튼을 누르고 다니는 것만 해도 이리 바쁜데 별안간 남편이 바리캉 구입을 내게 권유했다.
미용실에 가면 손가락 한 마디나 될까 할 정도로 많이 자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꼬박꼬박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돈이 아까웠나 보다.
하기야 남자들 머리는 한여름 들판의 잡초처럼 자라니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엊그제 미용실을 간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면 또 덥수룩. 깔끔한 맛은 한 일주일 가나? 이주쯤은 그럭저럭 봐줄만하다가 삼주가 되면 "와, 못 봐주겠다. 얼른 미용실 가서 낼 당장 군입대 해도 될 만큼 잘라 주세요~ 하고 자르고 와."라는 말이 뇌의 필터를 거치지도 않고 자동으로 마구 나온다.
여자 머리야 시간이 흘러 좀 길다 싶으면 묶기도 하고, 올리기도 하고, 여차저차할 텐데 남자들 머리는 잡아 묶을 수가 있나 땋아 내릴 수가 있나 대책이 없으니 별 방법이 없다. 자주 미용실을 가는 수밖에.
하지만 물가가 안 오른 게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오르더니 미용비도 덩달아 올라 가격이 만만치 않다. 아깝다 생각했는지 자린고비 남편은 나더러 바리캉을 사서 아들 머리는 좀 잘라 주는 게 어떠냐고 날 떠본다.
갑자기 친정 엄마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씀이 내 귀에 메아리쳐 울려왔다.
손으로 하는 취미생활은 모두 좋아하는지라 실십자수, 보석십자수, 그림, 뜨개질, 동양자수 등등 열심히 했었다. 한데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힘들여 작품을 완성해 봤자 벽에 거는 것 이외에 아무 쓸데없는 장식용에 불과하니 벽에 자꾸 못질만 하는 것보다는 실용적인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재봉틀을 하나 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당시 30만 원이 넘어가는 초기 구입비용이 꽤 비싸다며 굳이 재봉틀을 왜 사려고 하느냐 반대했다. (처음에만 몇 번 깔짝대다가 베란다에 보관용으로 둘 것을 간파한 것 같다) 재봉틀의 필수 재료인 천이며, 실이 집안을 가득 차 폴폴 날릴 것까지 떠올렸는지 집안 어지러워진다며 내 요청은 이도 안 들어갔다. 뭐 하나 꽂히면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그 반대를 꺾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말을 쏟아내 회유했지만 남편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가 왜 거기서 나오냐고... 그렇다면 난 중꺾그마(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다!
혹여나 좋은 수가 있을까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요새 이런 걸로 애아빠랑 실랑이 중이다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엄마의 말.
함부래이~!
엥???
딸 편을 들어주고 좋은 방안을 알려주셔야죠. 이쁜 사위라고 지금 사위 편을 들면 우짭니꺼?
왜 그러시냐 "내 편 좀 들어도~" 하고 되지도 않은 사투리를 써 봐도 엄마는 나의 편으로 넘어올 기미가 없다.
옷을 수선할 일이 생기면 수선소에 맡기고, 옷을 만들 생각 하지 말고 사 입으라시는 거다.
이유인즉슨 집에서 내가 옷을 만들고 수선해 버릇하면 그 일 때문에 시간이란 시간은 온통 다 빼앗길 거라고.
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 만일 재봉틀이 있는데 안 하면 게으름을 부리는 나 자신을 스스로가 못 견딜 것 같긴 했다.
슬슬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재봉틀 앞에 앉아서 하겠지. 하지만 몇 개 완성하다 보면 그게 그 타령이고 목은 뻐근하고, 허리는 아파올 테고, 좀이 쑤실 것이다. 여태껏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니 결말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지금 나더러 바리캉을 사란다.
하고 싶은 마음이 동한 재봉틀도 마다하고 마음을 굽힌 나에게.
음...
만일 사면
머리칼 다듬는 일을
내가 아들만 하게 될까?
남편도 내게 머리를 디밀겠지?
그럼 딸도 해야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나의 자유시간은 미용 시간으로 갈가리 찢겨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나는 단호히 사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나의 자유시간은 소중하니까.
괜한 희생으로 내 몸은 더욱 힘들어질 테고 힘들어도 어디 가서 보상도 못 받는 그런 일은 시작부터 하지 않기로 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해도 티는 안 나는데 안 하면 엄청나게 표가 난다. 돌아서면 또 쌓이고 잠깐 쉬면 또 도로아미타불인 일의 반복인 집안일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데 거기다 또 추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소중하고 나의 시간도 소중하다.
따라서 내 사전에 바리캉 구입이란 없다.
아이들, 남편 모두 자고 나는 나만의 고요하고 자유로운 이 시간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주 신선놀음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