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한 장 남은 흑백 사진 20220524
“명자는 잘 지내는지 모르겠구먼.”
“명자가 누군데?”
“있잖아, 오 학년 때 전학해 온 여선생님의 딸. 우리와 함께 졸업하자마자 곧 엄마 따라갔지. 그 애 엄마가 전근을 갔잖아.”
첫사랑이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짝사랑입니다. 친구의 말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이 있습니다. 시골의 두메산골 초등학교 졸업생들입니다.
‘강 소천 선생의 꿈을 찍는 사진관과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
나는 이 글을 좋아합니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어릴 때는 책이 없어서 못 읽었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저께 도서관에 갔는데 문득 동화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몇 권을 빌려 집에 돌아왔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지난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에 되었습니다. 부모님, 친척, 친구들……. 떠올리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된 얼굴입니다. 이들은 꿈에 찍히는 얼굴과 같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본 모습입니다.
내 친구가 이야기 한 명자는 머릿속에 육 학년 때의 모습 그대로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귀를 감출 정도의 단발머리 소녀입니다. 수줍음에 말을 나눌 기회가 적었지만, 남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가을이면 해마다 글짓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곧이어 군내 글짓기대회가 이어졌습니다. 나는 일기를 꾸준히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글짓기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명자와 나는 대회를 앞두고 몇 주간 학교에 남아 글쓰기 지도를 받았습니다.
“나 육 학년 때 군내 글짓기 나간 거 알고 있니?”
“자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일 번 아니면 이번이었잖아.”
친구들의 머릿속에는 내가 기억하는 추억의 장면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육 년 내내 키가 작았습니다. 땅꼬마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키가 작고 상고머리를 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내가 지금까지 간직해 온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기 전날에 가을비치고는 꽤 많이 내렸습니다. 논에는 잘 익은 벼 이삭이 바람과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군데군데 쓰러졌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인솔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부근의 학교에 볼일이 있어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명자와 서먹해서 거리를 두었지만 먼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 앞 큰 개울에 이르렀습니다. 건너려니 징검다리가 떠내려가 신을 벗어야 합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엉덩이를 내밀었습니다. 사양할 줄 알았던 내 마음과는 달리 명자는 뿌리치지 않고 등에 업혔습니다. 내를 건너자, 명자는 바윗돌에 앉아 쉬어가자고 했습니다. 내가 세찬 물살에 발을 딛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내가 발을 닦아줄까?”
대답하기도 전에 명자의 손이 내 발바닥을 간질였습니다.
내가 지금 떠올린 얼굴은 피부가 고운 그 단발머리의 소녀입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의 주인공은 여자애와 동갑이지만 떠올리는 모습은 지금의 나이와 여덟 살 차입니다. 나는 지금 어떨까, 나는 육십여 년의 차이를 둔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자의 지금 모습은 전혀 그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살아있다면 그도 할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겠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늘 육 학년의 앳된 모습입니다.
남자들의 모임이고 보니 여자 동창 이야기만 나오면 너도나도 지지 않으려 합니다. 추억담을 꺼내놓는 통에 한동안 주위가 시끄럽습니다. 그들도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 차례 기별했지만 두 명만 참석했습니다. 그마저도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이다 보니 왠지 어색하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볼 장 다 봤는데 뭐가 어색하냐고 했지만, 여자애는 쌀알에 뉘가 섞인 셈이라며 모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각자 마음에 두었던 여자애들을 입에 올렸습니다.
“옥순이, 말도 마라. 내 애인이었잖아.”
“옥순이가 뭐야, 형수님한테. 나와 가까이 지냈던 것은 학교가 다 아는 사실인데.”
“지금 어디 사는지 알고 하는 소리여?”
“하늘에 살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두 친구가 잠시 입씨름을 했습니다.
우리는 졸업을 앞둔 이른 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흑백 사진입니다. 기억을 떠올렸지만 각자 보관하고 있다는 확신은 서지 않아 집에 돌아가면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다음 모임에서 사진을 가져온 사람은 없습니다. 고향에 사는 친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에 문의했지만 오래돼서 보관이 되어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 명중에 가지고 있는 친구가 없다니 다소 허탈한 마음입니다.
어찌 된 일인가. 그다음 모임에 우리들의 어린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친구 여동생의 앨범에서 사진을 발견하게 됐다고 합니다. 한 장씩 손에 들려졌습니다. 흐릿한 흑백의 복사물입니다.
“알아보겠어? 알아보겠어.”
각자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습니다. 잊었던 친구의 얼굴을 찾는 동안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별을 좋아해서 일찍 별이 된 종갑이, 말없이 떠나 잠시 가슴앓이하게 했던 단발머리 명자가 내 앞줄에 있습니다. 나는 머리가 백발인 채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그들은 아직도 소년이고 소녀입니다.
나는 꿈의 사진관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가끔 꿈의 사진을 찍는 중입니다. 소년, 소녀인 친구들, 아직도 젊은 아버지, 이제 환갑을 넘긴 어머니……. 나는 가끔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