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비밀의 숲 20220604
“웬 떡이야!”
앵두가 한 움큼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신맛과 달콤함이 입안에 감돕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학교와 공원은 철 담장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습니다. 나는 계절에 맞춰 이곳을 들립니다. 꼭 한 철입니다. 모든 식물은 시기가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움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잎을 떨어뜨립니다. 곤충의 한살이처럼 식물의 한 살이라고 하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그늘은 물론 열매까지 줍니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이면 소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멍 때리는 장소로도 제격입니다.
이곳은 공원이면서도 크게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장소입니다. 학교 담장을 따라 큰 나무들이 오밀조밀 서 있고 밖으로 관목들이 우거져 봄부터 가을까지 짙은 그늘을 이룹니다. 다소 후미진 곳이라서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나는 유년기를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몰라도 숲 속을 좋아합니다. 종종 길을 놔두고 길이 아닌 곳으로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조용해서 좋고 어릴 때 보아 온 낯익은 식물들과 마주치면 반갑습니다. 낯선 식물이라도 보게 되면 잎이나 줄기를 따서 이름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앵두는 며칠 동안 내 차지입니다. 사람의 접근이 없고 보면 익어가는 속도에 맞춰 몇 알씩 입에 넣고 음미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둘레 길로 나오자, 옷을 털었습니다. 요즈음 가뭄이 심해서일까 아니면 꽃가루 때문일까 옷에 먼지가 뿌옇게 묻었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공원의 중앙부에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을 수 있는 기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보이지 않던 먼지를 털 수 있는 기계도 있습니다. 집으로 오다가 신발이며 옷에 남은 먼지를 깔끔하게 털어냈습니다.
“옷이 그게 뭐예요, 신발은.”
언제인가부터 기계 덕분에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일이 줄었습니다.
앵두를 따다 보니 옆에 있는 보리수나무의 열매가 부풀기 시작합니다. 나는 해마다 보면서도 오디가 익는 시기와 보리수가 익는 시기를 혼동합니다. 오디는 익어 떨어지는데 늘 보리수도 익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앵두가 오디보다 조금 앞서 익어 가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보리수는 이십여 일쯤 지나면 붉은색을 띠지 않을까 합니다. 내 수첩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일부러 들칠 마음은 없습니다. 열매에 목을 매는 일이 아니고 보면 내 입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떨어져도 나무랄 이유가 있겠습니까.
가을에도 이곳은 내 방문 장소가 됩니다. 모과나무 몇 그루가 키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덩치를 마음껏 키웠습니다. 열매들이 가지마다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내 엄지손톱만 한 열매들을 잎 사이에 숨기고 덩치를 키우는 중입니다. 몸집이 커질수록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모과가 주먹만큼 커지면 나도 모르게 관심을 두게 됩니다. 노란색이 짙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딸 생각은 없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내 차지입니다. 단풍이 들고 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열매는 알몸을 보이며 햇살을 마주할 것입니다.
‘툭’
열매가 풀숲에 곤두박질쳤습니다.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한 살림을 하던 열매들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잎을 헤쳐 잘생기고 잘 익은 놈 몇 개를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숙성될수록 향은 방 안을 채웁니다. 한두 달쯤 지나면 향이 다하고 아름다움도 잃습니다.
‘못생긴 게 모과라고 하더니만 외양만이 아니라 색깔도 그렇습니다.’
노란색이 점차 흑색으로 드디어 검은색으로 변화합니다. 코와의 거리와 눈 맞춤이 멀어졌습니다. 이제는 모과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겨울을 맞이하는 까칠해진 숲 속으로 향했습니다. 나에게 선택받지 못한 많은 모과가 ‘초록은 동색’이라는 듯 같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슬며시 그들 옆에 내려놓았습니다.
아! 버찌 따먹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앵두보다 앞서 따먹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앵두와 견줄 수는 없지만 어릴 적 주전부리로 환영받았습니다. 산속의 버찌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내 발길이 자주 닿는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새둥지에 손이 가다 멈췄습니다. 괜한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대신 초막이라도 지어야 할까. 어느새 눈이 보이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