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열매의 계절 20210908
가을을 놓고 단풍의 계절, 수확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독서의 계절 등 다양한 표현을 합니다. 나는 이에 하나를 덧붙입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라고. 요즈음은 밖에 나가면 크고 작은 갖가지 열매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한동안은 쥐 죽은 듯 몸집을 불리며 초록 잎사귀 뒤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가을 태양은 대단합니다. 이들을 불러내어 화장을 하라고 성화입니다. 붉은색으로 노란색으로 또 밤색 등으로 서서히 단장을 시킵니다. 나는 보름 전부터 나무 열매들을 보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우리들이 먹는 사과, 배, 감, 밤을 비롯하여 공원의 산수유, 산사, 팥배, 모감주, 애기사과를 둘러봅니다. 모자 속에 몸을 감추고 밖을 엿보는 도토리와 상수리도 힐끔 쳐다봅니다.
오늘은 아내와 시장을 가는데 칠엽수 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여름에 흰꽃을 달고 있던 나무는 어느새 탁구공만 한 열매를 옹기종기 달았습니다. 마음이 성급했나 봅니다. 열매들이 군데군데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 뒹구는 것도 있지만 호두가 아람을 벌듯 낙하며 겉껍질과 알맹이가 분리된 것들도 있습니다. 알맹이가 마치 밤톨 같습니다.
“여보 저게 뭐야. 밤?”
나는 침묵했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밤나무가 어디 있기에 여기에 떨어져 있지. 먹어도 될까?”
아내는 어느새 나무밑에서 열매를 주워 올렸습니다. 싱싱한 알 열매를 만져보며 예쁘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칠엽수 열매.”
예전에는 저것을 주어 가지고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한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에 흩어진 열매를 줍자 한 아기 엄마가 묻습니다.
“무슨 열매예요?”
“칠엽수 열매입니다. 마로니에라도 하지지요.”
먹을 수 있느냐고 하기에 독이 있어 먹을 수는 없고 약재로 쓸 수는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마로니에라는 말은 했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 앞에 있는 나무는 칠엽수가 맞습니다. 겉 열매에 가시가 없습니다. 가시가 있는 것이 서양에서 들어온 마로니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여자에게 마로니에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엎질러진 물입니다. 장을 보고 그곳에 왔을 때 아기 엄마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외모로는 구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잎의 모양이나 열매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루루 루루 루루루~ 루루루 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1990년대에 많이 불렸던 노래입니다.
마로니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칠엽수과에 딸린 갈잎 큰 키나무입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가로수로 많이 가꾸고 있습니다. 오뉴월에 흰색 바탕에 붉은 무늬가 있는 종 모양의 꽃이 핍니다. 서울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의 터전으로 문을 연 마로니에공원은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자리에 있습니다. 마로니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마로니에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각종 야외 문화행사장, 조각 전시장, 문예회관 등이 있는 이곳은 서울 시민의 꿈과 낭만이 어린 문화예술의 거리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재작년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중학교 옆 공터에는 칠엽수 열매들이 수없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걷다 보면 발길에 차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속알맹이가 매끄럽고 윤이 나, 좋아 보이기에 몇 개를 주워왔습니다.
“밤이에요.”
칠엽수 열매라며 나무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쁘다는 말을 하기에 그 후 싱싱하고 매끄러운 것들을 모아 작은 바구니에 담아 놓았습니다. 도토리도 몇 개 주웠습니다. 은행잎과 단풍잎도 가져왔습니다. 거실도 가을입니다.
첫눈이 내리던 날입니다. 가을이 물러갑니다. 나는 바구니에 담긴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습니다. 대신 겨울을 가져와야겠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첫눈을 바구니에 담는다면, 담는다면, 가을과는 달리 참을성이 없을 듯합니다.
칠엽수 옆 모과나무의 마지막 남은 열매가가 툭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끝내 가을을 지켰습니다. 향기가 그윽합니다. 노란 모과를 집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 놓았습니다. 다음을 위해 가을은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합니다.
다시 바구니에 칠엽수 열매가 지난해와 다름없이 담겼습니다. 도토리가 통통해집니다. 앙증맞은 빈병이 바구니 옆에 있습니다. 올해는 부들 열매도 하나 꽂아야 할까 봅니다. 옆집 아이가 아이스바라고 탐을 내면 어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