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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Feb 04. 2023

등산에 의한, 등산을 위한 여행일지(1)

23. 서대산 (2022.03.28 월)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앞두고 직장인은 엄두도 못 낼 엄청난 일을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띵하고 울리는 단어는 여행이다. 맛있는 거 옆에 맛있는 거는 행복이 2배니까 여행과 산행을 합치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2배겠지. 알만한 지방 중에 서울에서 멀지 않고 갈만한 높이의 산이 많은 곳을 찾다 보니 대전이 알맞았다.


막상 가려니 대전은 처음인 데다 마냥 혼자 다니기엔 겁이 났다. '4박 5일 동안 대전에 머물러면서 산에 가려고 해요. 혹시 동행하실 분 있나요?' 산악회 단톡방에 살며시 모집글을 올렸다. '저요. 본가에 내려와서 쉬고 있어요. 제 차로 함께 이동하실래요?'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대전에 거주 중인 사월님이 나와 산행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렇게 묘한 여행을 시작한다.


월요일 아침 9 50, 대전역에 도착해서 사월님을 만나 바로 산으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르니까 들머리인 개덕사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긴장이 신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사월님은 좋은 사람이었고 안전하고 재밌는 산행을   있었다.




서대산

2022년 3월 28일 월요일, 대전 여행의 첫 일정으로 개중 제일 높은 산을 선택했다. 서대산의 장점은 조금만 올라가도 마을풍경이 한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개덕사가 해발 300m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900m 산이지만 실제로는 600m만 오르면 정상을 만난다.  서대산의 단점은 조금만 더 올라가면 풍경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경이 나오더라도 아까 본 철지붕, 비닐하우스 풍경이다. 그래도 맥이 풀릴 만큼 지루한 풍경은 아니다.



#에메랄드가 풀어준 긴장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덕분에 산길 초입에서 맑은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만났다. 물빛이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모르는 지역과 모르는 사람의 콜라보로 꽁꽁 굳어있던 몸이 셔벗정도로 풀렸다. 여기 이곳은 처음이지만 폭포와 산은 나의 오랜 친구니까 긴장을 풀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가요

사월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는데 뒤돌아보니 사월님이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도 근처 바위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몇 분 뒤, 사월님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의 등산이라 체력이 올라오지 않네요. 갑자기 어지러워서 말도 못 드리고 쉬었어요. 저 때문에 늦게 올라가면 안 되는데 어쩌죠.' 나는 포도당 캔디를 건네며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가면 되죠'하고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무 번 넘게 쉬어가며 정상을 향해 갔다.



#앞장서는 건 처음이라서

사월님은 나보다 체중이 훨씬 덜 나가는 것 같은데 묘하게 몸이 무거워 보였다. 가쁜 숨을 쉬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배낭에는 뭐가 있나요?' 말을 할 힘도 없는지 주저앉아서 배낭을 풀고 짐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있는 1.5L 스탠리 보온병이 나왔다. 주전자로 방금 끓인 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김이 펄펄 나는 물이었다. 다음으론 컵라면 2개가 수줍게 가방에서 나왔다.


다른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손을 멈췄다. 혹시 하는 마음에 '그냥 물은 없나요?' 물었다. 얼굴을 붉히며 뜨거운 물만 챙겼다는 답변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목도 마르고, 가방도 무거우니 등산이 힘들었구나.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았을터. 앞장서는 산행은 처음이라 내가 부족했구나. 그 자리에서 내 물통을 건네고 뜨거운 보온병은 내 가방에 옮겨 담았다. 연신 미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살았다'는 미소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정상에서 라면과의 작별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2시간 만에 만난 정상.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기쁨도 잠시 가방이 무거워서 철퍼덕 바닥에 앉았다. 사월님도 잠시 쉬다가 주섬주섬 가방에서 과일을 꺼낸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가방은 물건이 끝없이 나오는 도라에몽 주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씻었다는 청포도를 음미하며 마지막 남은 내 물을 나눠마셨다.


이상하게도 정상에서 입맛이 싹 사라져서 라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아하니 사월님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처지곤란한 뜨거운 물은 어쩐담. 결단을 내린 나는 바위 위에 뜨거운 물을 졸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올라올 땐 이고 지고 왔지만 하산할 땐 내 무릎을 아작 낼 수 있으니 함께할 수 없다. 옆에 있는 나무뿌리가 상할라 아주 천천히 뜨거운 물을 흘려보냈다.


뜨거운 짐을 덜어내고 하산 전에 주변을 둘러보니 산맥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대전은 산으로 이루어진 곳 같았다. 친구들에게 대전에 여행을 간다고 하니 재미없는 도시라며 만류했다. 산을 타는 사람에게 대전만큼 재미있는 도시가 있을까? 올라온 것과 마찬가지로 쉬엄쉬엄 내려가며 산행을 마무리했다.



#산행을 마치며

개덕사에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 3시였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많이 고팠다. 사월님의 단골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짬뽕을 먹었다. 그리곤 금산구청 근처에 성당을 개조한 카페를 찾아갔다. 남들이 보면 10년 넘은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곤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웠다.


"사월님, 내일도 저랑 산 가실 거죠?"

"내일은 내일의 저만 알 수 있어요."

"그럼 오늘은 어때요? 오늘 산 2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내 질문에 깊은 고민을 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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