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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Nov 05. 2023

등산에 의한, 등산을 위한 여행일지(2)

24. 진악산 (2023.03.28 월)




서대산에 이어 같은 날 진악산에 올랐다. 대전 여행 2탄을 작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키보드의 먼지를 털고 어수룩하게 글을 뽑아낸다. 온통 산 생각뿐이었던 그때를 회상하며 잊었던 열정의 불씨가 살아나길. 예전의 나와 조우하며 현재를 돌아보는 시간은 긴장되면서도 감동적이다.



진악산

2022년 3월 28일 월요일, 하루에 산 2개를 타는 게 얼마 만이었더라. 심지어 야등이라니. 북한산 이후 간만의 야간 산행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끝내주는 풍경을 봤다. 상추 3,000원어치를 샀는데 5,000원어치를 받고 깻잎도 덤으로 얻은 기분이었다. 랜턴이 없어서 핸드폰 후레쉬에 의존한 채 떨면서 내려왔지만, 인심 후한 진악산 덕분에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원샷을 부르는 해지는 산

처음 대전 산행을 계획했을 때, 진악산은 2일 차에 오를 산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작스러운 비 예보가 있었다. 욕심 부려 우중 산행을 할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던 나를 구원해 준 사월님의 한마디. '비 오는 산보다 해지는 산이 더 멋지죠.' 씩 웃으며 '아무래도 그렇죠?' 답하고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사월님도 덩달아 음료를 해치우곤 비장하게 카페를 나왔다.


오후 5시 30분이 돼서야 산행을 시작했다. 일몰까지는 1시간 20분가량 남은 상황이라 초고속 산행을 약속하고 등산화 끈을 조였다. 진악산이 730m인데 광장주차장 고도가 높아 400m만 오르면 정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차가 330m를 대신 올라와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빨리 가야 하는데..아는데..

올라가는 길에 만난 정승이 웃기고 괴상하다며 깔깔, 풍경이 끝내준다며 멈춰서 찰칵. 머리로는 시간이 없는 걸 알지만, 마음은 낭만 넘치는 산세에 황홀하기만 하다. 나무길이 멋져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둘 중 한 명이 일몰을 못 볼까 봐 걱정하면, 등산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까 금방 간다며 번갈아 가며 서로를 다독였다.



#얼떨결에 트레일러닝

시간을 잘 체크했는데도 해가 간당간당하게 산마루에 끝에 걸렸다. 이런, 아직 정상까지 거리가 꽤 남았는데 어쩌지. '우리 이제 조금 뛰어볼까요?' 일몰을 놓칠까 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외쳤다. 나 홀로 정상을 오르고 싶진 않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챙기며 정상까지 숨 가쁘게 뛰었다. 서대산에서 거북이 산행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곰 나오기 전에 내려가기

헉헉대며 정상에 도착하니 해가 반쯤 가려졌다. 고층 건물도, 안개도 없는 투명한 하늘을 도화지 삼아 열심히 예술 활동을 하는 해를 말없이 지켜봤다. 하늘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물감처럼 번지다가,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확 변했다. 하늘이 완전히 남색이 된 6시 5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아름답던 풍경이 점차 어둠에 가려지니 시각 대신 청각에 의존하게 되었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소리로 서로의 위치를 알려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 감정이 지배당하지 않도록 '정말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산행이네요'와 같은 다정한 말도 잊지 않았다. 사실 그 말을 하면서도 곰이 나타나서 나를 반으로 찢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다정한 말이 소진되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을 땐, 핫둘핫둘 구령을 외치며 발을 맞췄다. 거의 축지법을 쓰며 내려온 것 같다. 



#산행을 마치며

광장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 56분. 잔뜩 긴장하며 내려온 탓에 주차장 가로등 불빛을 보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분주하게 등산화의 흙을 털고 차 문을 탁 닫고 나서 잠깐의 침묵은 분명 안도의 표현이었다. 준비된 체력을 모두 소진했으므로 저녁도 건너뛰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전기장판 위에 누우니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고된 하루를 보내 빨리 잠들 것이라 기대했는데 긴장의 후유증으로 앓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전기장판 온도를 4에서 6으로, 6에서 8으로 높이며 몸이 보글보글 끓길 기다렸다. 긴장이 모두 증발할 때까지 끙끙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1인실로 예약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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