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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Nov 07. 2023

등산에 의한, 등산을 위한 여행일지(3)

25. 천태산 (2022.03.29 화)




다정함과 험악함이 공존하는 ‘악악’ 산. 로프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암릉 마니아라면 A코스 적극 추천. 손에 굳은살 배기는 게 싫다면 다른 코스 또는 다른 산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도파민이 뿜뿜 해서 재밌었던 산.



#이렇게 부지런하다니, 내가?

아침에 알람 없이 눈떠보니 새벽 5시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하다니 믿을 수 없다. 낯선 곳에서의 잠자리가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10시쯤 잠들었기에 수면시간은 충분했다. 새벽공기와 고요가 익숙하지 않은 탓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유튜브로 명상 영상을 틀어 삐걱거리는 몸을 풀어줬다. 어제 저녁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몹시 허기졌다. 명상 후 집에서 싸 온 사과와 크래커, 두유를 아침으로 먹었다.


배를 채우고 어젯밤에 지쳐 쓰러져 둘러보지 못한 숙소를 찬찬히 살폈다. 1박 23,000원이라는 착한 숙박비로 방 컨디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따뜻한 바닥과 깨끗한 화장실, 친절한 안내가 마치 내 집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만큼 푸근했다.


오늘은 혼자 산을 가는 날이므로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 차 없는 뚜벅이는 기차로, 버스로, 두 발로 산을 찾아가야 한다. 무궁화호를 타고 대전역에서 옥천역까지 이동했다. 기차는 멀리 갈 때나 장시간 탔던 이동 수단인데, 마을버스처럼 11분만 타고 후딱 내리는 것이 생경했다.


배차간격이 1시간 30분인 버스에 올라탔다. 탄 지 15분이 지나도 출발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어르신들은 저마다 이야기 꽃을 피운다. 좁은 동네인지라 모두 서로를 아시는 듯했다. 서울의 152번 버스에서는 볼 수 없는 옆 집 사람의 흉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듣기 싫은 소리라면 이어폰을 꺼냈겠지만 왠지 정겨워서 듣고만 있었다. 남 욕이 정겹긴 처음이었다.



#다정하고 험악한 산

들머리를 지나 영국사로 진입하면 큰 은행나무가 반긴다. 1,000년 넘은 나무라던데. 노란 잎이 널리는 계절에 왔으면 눈이 호강했겠지만 상상으로 텅 빈 가지에 노란색을 채웠다.


요즘 한 세기 넘은 나무를 찾기 어렵다던데. 은행나무가 입이 있다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엄청난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다. 은행나무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나의 이야기를 쪽지에 적어 매달고 자리를 떠났다.


천태산은 민간인이 개설한 산이라고 한다. 투박하지만 산 곳곳에 개설인의 애정이 묻어있다. 여타 산에는 없는 '등산 코드 안내도 보관함'이란 것도 있었다. (용도를 잘 모르겠지만 생긴 건 마치 휴지통 같았기에 보관함을 열어보진 않았다) 뚱땅거리는 느낌의 픽토그램과 가끔은 비뚤게 붙여진 글자가 눈길을 끈다.


다정함이 지나가고 험악함이 남았다. 고개가 넘어가는 아찔한 경사에 로프가 줄줄이 매달렸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암릉 구간. 암릉 코스에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바위를 보여준다. 마치 헬스 동작에 익숙해지면 곧바로 변형 동작을 알려주는 PT선생님 같달까.


장갑을 착용했음에도 마찰로 손이 아릿할 정도로 끝없이 로프를 잡고 올랐다. 뒤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와서 내려갈 수 없고, 내려가는 것이 더 무섭다. 빨리 올라 D코스로 하산하는 수밖에 없다.



#김밥 먹고, 사진 찍고, 내려간다.

'어머, 아가씨 혼자 이 돌산을 온 거야? 어려운 코스인데 대단하네.' 정상에 올라오니 돗자리에서 식사를 하시던 어머님께서 놀라 물으셨다. 말동무 없이 묵묵히 산을 오르다가 중간에 김밥 먹을 때만 입을 열었는데, 말을 걸어주니 너무 반가웠다. 씩씩하게 '네!' 답하곤 정상석 앞으로 갔다.


애석하게도 정상석 인근에는 등산객이 없어서 10초 타이머를 맞추곤 우다다 뛰어 정상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못 볼 현장이 될 것만 같아 악착같이 사진을 찍었더랬다.


정상에서 D코스의 멋진 경치를 보며 하산하는 것을 추천한다는 개설인의 팻말을 봤다. 경치가 끝내준다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호들갑을 떨고 싶을 정도인데, 내 옆에 사람이 없다. 혼잣말로 '말씀하신 것처럼 하산 경치는 정말 멋지네요. 개설인님' 중얼거렸다.



#산행을 마치며

오전 11시에 산행을 시작해서 오후 4시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일정이었다. 천태산 주차장에 괜찮은 카페가 있었는데 '4시간 산행 후 30분 정도는 쉴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지나갔다.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오후 3시 46분에 주차장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들러 세수하고 나니 버스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카페 메뉴판을 볼 새도 없이 뛰어서 21번을 탔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눈꺼풀이 무거워 역 앞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고 숙소 가서 바로 잤다. 어제는 10시 취침, 오늘은 8시 취침. 정말로 산만 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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