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둔산 (2022.03.31 목)
대전의 마지막 산으로 대둔산을 골랐다. 호기롭게 마지막날 제일 높은 산을 올랐다. 빨간 흔들 다리, 빨간 삼선계단, 빨간 케이블카. 들쑥날쑥한 돌 길에 무릎이 아프지만, 빨간 맛 스릴을 원한다면 추천한다. 힘들었던 만큼 즐거웠던 산행이 머릿속에 짙게 남아 시간이 흐른 뒤에도 대둔산의 빨간 맛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들머리까지의 긴 여정
어젯밤에는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새로 입실한 옆 방 사람들이 밤새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판을 벌인 탓이다. 대둔산까지 갈 길이 먼데 늦잠 잘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선잠을 자며 새벽 2시, 3시, 5시, 5시 50분 계속 깼다. 그리고 7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서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3박 4일 동안 나를 잘 품어준 숙소에 '잘 쉬었다 갑니다' 메모를 한 장 남기고 나왔다.
대둔산 들머리까지의 타임테이블은 아래와 같다.
7:20 - 숙소 출발
7:35 - 대전역 배낭 보관
7:45 - 314번 버스 탑승 (25분)
8:10 - 머티네거리 도착
8:15 - 34번 버스 탑승 (45분)
9:00 - 대둔산 휴게소에서 도보 이동 (25분)
9:25 - 대둔산 매표소 도착
9시쯤 대둔산휴게소에 도착해 고속도로 갓길을 걸었다. 덤프트럭이 쌩쌩 지나가는 도로에 덩그러니 남겨지니 쓸쓸했다. 영화였더라면 히치하이킹에 성공한 후 대둔산 매표소까지 단숨에 갔겠지만, 여기는 현실이라 25분을 꼬박 걸어서 도착했다. 예전에 도보 국토종주가 유행일 때, 하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하지 않았다. 오늘로써 그때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초면이지만 함께해서 반가워요!
들머리까지는 혼자였지만, 산행은 미루님과 함께했다. 비슷한 커플 가방을 메고 돌이 널린 대둔산을 다정하게 올랐다. 서로 발목 조심하라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동심바위와 금강문을 지났다.
#케이블카도 좋지만, 빨간 맛은 못 참지
돌계단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해서 무릎이 아팠다. 돌이 깊숙이 박혀있지 않아 덜컹거려 아찔했고, 높은 습도로 돌 표면에 이슬이 맺혀서 미끄러웠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올라갔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었달까?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고 싶었나 보다. 상부케이블카 팻말에 유혹 당해 동공이 약간 흔들리긴 했다.
케이블카는 동공을 흔들고, 흔들 다리는 다리를 흔든다. 엄청난 높이와 유연함을 자랑하는 대둔산의 흔들 다리. 한 걸음 뗄 때마다 진동이 느껴져 눈을 질끈 감게 된다. 평일이라 그런지 등산객이 없어 무섭지만 여유롭게 사진을 찍었다. 돌 틈에 피어나듯 자리 잡은 나무들이 참 멋진 배경이라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구름다리가 빨간 맛 끝판왕인줄 알았는데, 삼선계단이 남아있었다. 계단 경사가 70도에 육박하는 데다가 발판이 좁고, 구멍이 숭숭 나있다. 무엇보다 흔들 다리가 아닌데 흔들린다.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위도 아래도 아닌 앞의 철계단만 보고 네 발로 신속하게 기어서 올랐다. 계단에 녹이 낭랑하게 슬어 있어서 열심히 외면하며 올랐다. 빨간 맛을 넘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정상, 튀김소보로, 새, 기쁨
대전의 마지막 산에서 명물 튀김소보로를 먹으면 멋질 것 같아 아침에 부지런하게 성심당에 들렀다. 웅장한 정상석(타워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앞에서 빵을 먹고 있는데 새 두 마리가 서성였다. 똑똑한 녀석인지 빵을 떼어 손바닥에 올리니 바로 올라와 앉았다. 새의 발바닥 젤리는 말캉하고 발톱은 날카로웠다. 고칼로리 음식을 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특식 기분으로 조금만 주었다. 나중에는 빵 대신 가져온 바나나를 잘라서 줬다.
#하산은 무릎이 아닌 돈으로 하기
9시 53분에 시작한 산행은 1시가 다되어서 끝났다.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내려오는데 무릎이 너덜거렸다. 케이블카를 타니 6분 만에 내려왔다. 갑자기 끝나버린 산행에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원래 끝없는 하산길을 걸으며 '집에서 쉴걸' 후회하는 것까지가 산행이지만, 무릎을 위한 현명한 소비였다.
#산행을 마치며
미루님이 대전역까지 태워주셨다. 지친 뚜벅이에게 그 순간 가장 상냥한 제안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대둔산에서의 점심은 내가 샀다. 대전역에 가기 전 성심상 본점에 들러 빵을 사냥했다. 나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다양하게 담았다. 빵을 담는 순간부터 집에 갈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마루님과 작별하고 서울행 KTX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대전에서 4일 동안 산만 탔을까? 대전 산행을 계획했을 때, 어떤 이는 건강을 해친다며, 어떤 이는 위험하다며 말렸다. 그런 말은 중요하지 않았고,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회인이 된 후 항상 '돼'보다 '안돼'가 쉬웠다. 그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일을 '안돼'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쉬웠다. 쉬운 것과 좋은 것은 다르다. 4일 동안 연속 산행은 어렵지만 좋은, 내가 아주 원하는 일이었다. '돼, 돼, 돼, 돼' 말하니 진짜 되었다. 이것으로 스스로에게 충분한 답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