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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May 21. 2023

<라따뚜이>와 <우영우>의 세계 'le festin'

만화 같은 세상을 여는 만화

'라따뚜이' 'le festin'


그러니까 이건 만화


가수 스텔라장이 영화 라따뚜이의 주제가 <le festin>를 부르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그 귀여운 영상이 주말 간 라따뚜이를 다시 보도록 나를 이끌었다.


라따뚜이


영화의 초반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각에 민감한 쥐(레미)가 있고, 그 쥐가 주인집 할머니의 대학살을 피해 하수구를 표류한다. 그러다 도착한 도시는 마침 파리다. 가족과 떨어진 채 파리 하수구를 헤매던 그가 도착한 곳은 한 식당인데, 그곳은 마침 오래 동경해 온 셰프 구스토의 레스토랑이다. 그러니까 이건 만화 영화다. 미각이 민감하고 요리사를 동경하는 쥐의 이야기니까. 수많은 '마침'들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모종의 사정으로 구스토의 식당에서 청소 일을 맡게 된 한 청년은 실수로 수프를 망치고, 그걸 눈 뜨고 볼 수 없던 레미가 그 수프를 구원한다. 처음에 청년은 쥐를 잡으려 하지만, 쥐가 만든 수프 덕에 요리사로 승진한 청년은 퍼뜩 깨닫는다. '이건 기회야!'


그는 모자 안에 쥐를 숨기고, 쥐는 모자 안에서 요리를 지휘한다. 청년은 성공가도를 달리며 주방 동료와 사랑에 빠지고, 쥐는 자아실현을 이루며 근사한 요리도 얻어 먹는다.



그렇다고 레미가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레미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쥐인 척하는 데도 지치고, 사람인 척하는 데도 질란다고. 그러니까 레미가 상징하는 건 정체성의 경계에 선 사람이다. 쥐의 집단에서는 '보통의 쥐'를 연기해야 하고,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사람인 척 살아야 한다. 레미의 본질적 정체성은 '쥐'이고, 레미는 인간을 동경하지만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쥐를 혐오한다. 정체성의 한계 속에서 레미는 '나 다운 삶을 살자'는 결론에 이르지만, 세상은 차별로 답한다. 청년이 진심을 담아 레미를 소개했지만 동료들은 모두 식당을 떠난다.


만화는 여기서 한번 더 시작된다. 돌아온 청년의 애인은 열린 태도와 환대로 레미를 인정해 주고, 청년은 쥐 떼와의 협동 작전 끝에 저명한 비평가의 찬사까지 얻어낸다. 셰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던 고답적인 비평가 역시 레미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내내 펼쳐지는 파리의 낭만적인 풍경과 <le festin>의 변주도 만화 같은 이야기와 공명한다. '별을 따기 위한 경쟁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제 축제가 내 앞길에 펼쳐질 거예요'


'라따뚜이'는 혐오의 주체와 대상이 적대를 넘어 공생하는 이야기다. 만화의 형식으로 풀어낸 자본주의 신화이기도 하다. 정체성(신분)에 구속되지 않고, 각자가 잘하는 일을 하면(쥐는 요리를 하고, 인간은 서빙을 한다), 개인과 사회 모두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현실


하지만 이건 만화다. 현실의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 여성의 업무 효율이 더 높은 직종에서도 기업은 여성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노동자의 건강과 업무 환경을 개선해 주는 것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에도 무작정 노동자를 쥐어짜기만 하는 것이 지상의 자본주의다. "언제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그냥 믿음일 뿐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자유시장론자들이 약속한 세상은 오지 않았다. 만화가 만화이듯 신화도 그저 신화이다.


현실에선 차별의 벽에 부딪힌 채 끝나버릴 레미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만화 같은 주변의 환대 덕분이다. 이 지점에서 라따뚜이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비슷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주변 인물의 지속적인 환대 없이는 이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은 '봄날의 햇살'이었다고 믿지만, 그것 또한 믿음일 뿐이다. 세상의 많은 소수자에게 우리는 '권모술수'만도 못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영우'를 둘러싼 배경도 어쩌면 만화 같은 세상 아닐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우영우'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도 차별받지 않고 능력을 펼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장 적은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실패한 시대에, '차별과 혐오를 근절하자'는 말은 단지 듣기 좋은 구호가 아니다. 표준화된 삶의 모델만 인정해 주는 문화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 그러니까 10대에는 명문대에 진학하고, 20대에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30대에 결혼하고, 40대에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는 모델이 한국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게 한국 사회가 규정하는 소위 ‘평범한 삶’의 모습이지만, ‘평범한 삶’은 시실 평범하지도 않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조사를 살펴보자. 2019년 기준 한국의 노동자 2056만 명 중 비정규직은 856만 명으로 전체의 42%를 차지했다. 해당 통계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일자리의 절반 이상은 비정규직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또 지방 국립대를 포함하더라도 “평범하게 괜찮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의 비율은 15% 남짓에 불과하다. 치솟는 집값으로 인해 평범한 청년세대가 수도권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서울은 좁아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될 수 없다. 서울에 인구가 몰리자 집 값이 올랐다. 청년들은 방보다는 관에 가까운 곳에서 몸을 접은 채 잠을 청한다. 서울에서 쫓겨났지만 생활 유지를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을 수용하려 수도권이 넓어졌고,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매일 아침은 불행하다.


대기업도, 명문대도 오천만이 들어가기엔 좁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삶은 '루저'로 규정된다. '국룰 인생'을 쟁취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삶은 너무 다르다. 그래서 가혹한 경쟁이 발생한다. 불확실한 경쟁과 과도한 자원 투입, 자기 착취가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부모들은 은퇴 자금을 전부 아이 학원비에 투입하며 가난한 노후를 예약하고, 매년 수능이 끝나면 아이들이 죽는다.


‘노오력’ 담론도 이 탓에 나왔다. 내 풍요로운 삶은 처절한 노력 덕분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노오력’이 부족한 탓에 그렇게 산다는 주장이다. 구조적 맥락이 거세된 주장이지만, 동시에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약자를 대상으로 한 지원을 ‘역차별’로 간주하며 반발하곤 한다. 반면 이러한 ‘정상성의 고리’에 들지 못한 시민들은 자신의 삶을 ‘정상적이지 못한’, ‘실패한’ 삶으로 인식하며 공론장에 나오기를 꺼린다. 결국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비정규직인 게 억울하면 시험 쳐서 들어오라”며 조롱한다. “여성은 여성적 직업에, 남성은 남성적 직업에 복무해야 하며,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규정한다. 더 다양한 삶의 모델을 인정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외모가 장원영이나 박보검 같지 않아도, 집이 서울 아파트가 아니라도, 대학에 가는 대신 음악에 인생을 걸어도, 장애가 있거나 이민을 왔어도 삶의 기본이 보장되어야 한다. 주변의 환대와 존중을 받고 능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만화 같은 원론의 세상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치열한 경쟁은 자연의 법칙이며, 약자가 도태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그럴 거면 뭐 하러 문명을 만들었냐’고. 살아남기 위해 가족과 개인 단위로 흩어져 각자도생해야 한다면, 경쟁에서 밀려났으면 맨손으로 고압전선도 깔고, 발암물질도 마시면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뭐 하러 문명을 만들었는가.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고, 매년 수능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이 스스로의 삶을 비관해 인생을 포기해야 한다면, 문명이란 너무나도 볼품없는 게 아닌가.


만화는 우리를 원론으로 돌아가게 한다. 우리가 편견에 갇힌 채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각자가 탁월하게 잘 하는 일을 할 때 자본주의는 더 건강하게 작동한다. 환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고, 환대 덕분에 사회의 재생산도 이루어진다. 만화를 보며 우리가 편견 없이 레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고, 혹은 우영우를 따듯하게 맞아주는 '봄날의 햇살'이 되리라고 결심하기만 해도, 만화는 세상은 조금 더 만화처럼 바꿔낸다.


<le festin>

L'espoir est un plat bien trop vite consommé
희망이란 너무 빨리 먹어버린 음식 같아요

À sauter les repas je suis habitué
식사 거르는 것은 일상이죠

Un voleur, solitaire, est triste à nourrir
외로운 도둑은 죽을 만큼 슬퍼요


À un jeu si amer, je ne peux réussir
이렇게나 위험한 모험을, 난 해낼 수 없어요

Car rien n'est gratuit dans la vie.
인생에 공짜란 없으니까요

Jamais on ne me dira
que la course aux étoiles, ça n'est pas pour moi
아무도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겠죠
별을 따기 위한 경쟁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Laissez-moi vous émerveiller et prendre mon envol
당신들을 놀라게 할 거예요, 그리고 날아갈 거예요

Nous allons enfin nous régaler
우린 마침내 대접받을 거예요

La fête va enfin commencer
축제는 마침내 시작될 거예요

Et sortez les bouteilles, finis les ennuis
그리고 술병을 꺼내요, 걱정은 이제 끝

Je dresse la table, demain nouvelle vie
난 상을 차릴게요, 내일은 새로운 삶

Je suis heureux à l'idée de ce nouveau destin
나의 새로운 삶을 생각하면 행복해요

Une vie à me cacher, et puis libre enfin
숨는 데 지쳤어요, 마침내 난 자유로워요

Le festin est sur mon chemin
축제 같은 삶이 내 앞길에 펼쳐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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