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바라기
A의 하루는 경계가 없다.
취침 시간, 씻는 시간, 식사 시간, 심지어 눈을 깜박이는 시간까지 어느 하나 기준이 없다. 시간에 대한 이름 설정은 A에게는 사치다. 그저 머리가 발끝까지 짓누르는 무게에 잠에 들고, 눌린 머리가 아파오면 샤워를 하고, 무엇을 꼭 먹어야 할까라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본다. 옆집 도어록 소리가 울리면 아침인가 하고, 상가 식당 앞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면 점심인가 하며, 배달 오토바이들의 불협화음에 저녁인가 한다. 할 일이 없는 건지,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건지,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제, 오늘, 내일이란 단어는 A의 하루에서 사라진 이름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A는 잠을 자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A는 자는 게 무섭다. 어느 순간부터 A는 꿈 없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A는 절대 악몽을 꾸지 않는다. A가 서있는 꿈의 세상은 항상 아름다워 잔인하다.
오늘은 새벽 2시가 되어 A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자정이 넘었으니 내일이 되는 건가. 아무튼 A는 의자에 걸려있는 겉옷을 걸치고 문을 연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두 발자국 정도 옮기면 도어록 소리만이 복도를 메운다. 바이올린 독주의 마지막 음보다 강렬한 소리다. ‘또각, 또각, 또각’,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관객에게 돌아서는 걸음 소리의 길이만큼만 A의 시간은 울린다. 물론 공연장은 박수소리로 가득하겠지만 복도는 적막에 가깝다.
새벽 2시 4분 A는 고민했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중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할 지에 대해. 웃기다. A도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가까운 쪽의 버튼을 눌렀다. 위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A는 자유분방한 상자들 사이로 회사 로고가 박힌 모자를 봤다. 표정이 없는 중년의 모자는 A에게 재촉의 한숨을 뱉었다. A는 엘리베이터가 자신의 머리를 끌어당기자 엘리베이터를 탄 이유를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바로 아래층에서 멈췄다.
중년의 모자는 카트 위에 쌓인 중심이 엉망인 종이 탑을 부드럽게 문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제각각 다른 열 개 남짓의 상자들을 빠르게 빼내어 나름의 질서로 문 앞에 다시 탑을 쌓았다. 곧이어 그는 휴대폰 카메라로 탑을 찍고 카트를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맙습니다.”
그가 말했다. 세 면의 거울은 그의 미소를 서로 비추었다. 그가 아무리 베테랑이라 해도 저 많은 택배를 옮기는 시간을 기다리는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가 다시 타기 전까지 문은 닫히지 않았다. A는 카트 때문에 문 한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A는 그를 기다린 게 아니었다. 그저 A는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