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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래를 통해 바라본 세상 <모비 딕>

[독후감]

by 낭낭

머나먼바다에서 하얀 물기둥을 뿜으며 헤엄치는 엄청나게 거대한 생물. 인간과 같은 포유동물이지만 바다에서 살아가는 신기한 생물. 육식을 하지 않고 플랑크톤과 자그마한 새우만 먹으면서도 지구상의 가장 거대한 동물로 자리 잡은 생물.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어 사냥이 제한된 보호받아야 하는 생물. 고래라는 생물을 얘기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러했다. 끝도 없는 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치지만 인간에 의해서 고통받는 알 수 없는 생명체. 너무 거대하기에 내가 나가는 바다 정도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고로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런 생명체라고 나는 간주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롭고 그렇기 때문에 환상 속에 둘 수 있었다.


<모비 딕>이라는 책의 존재는 그전에도 제목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을 확실히 느낀 것은 영화 <더 웨일>의 개봉 이후였다. 미이라에 출연했던 브렌든 프레이저가 2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동성애와 비만으로의 삶, 아버지로서의 삶 등을 다룬 영화인데 여기에서 <모비 딕>이 굉장히 강렬하게 인용이 되었다. <모비 딕>은 온라인으로 영어 수업을 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딸과 소통하는 하나의 매개체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가 너무 좋았어서 책에 대한 기대감이 정말이지 높았다. 그리고 플롯에 대해 공부하는 책에서도 인용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일까 생각하면서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는 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팍 지나갔다. 500장짜리 책이 2권이나 됐는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읽었는데 못 읽을 게 있겠어하면서 호기롭게 빌렸다.


아이고야 웬일이더냐,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고래에 대한 논문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jamie-morrison-VXom6ACaGR0-unsplash.jpg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비 딕> 中


이야기는 이슈미얼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자'라는 뜻을 가진 이슈미얼은 포경업에 종사하기 위해 배에 오르기를 결심하고 포경업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낸터컷으로 가서 포경선에 오른다.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 되는 플롯은 이슈미얼이 올라탄 배의 선장 에이해브는 바다의 악명 높은 흰 고래 모비 딕에 의해 다리를 잃었는데, 새롭게 시작하는 항해에서 놈을 향한 복수를 이루고자 하는 거다. 이 포경선은 모비 딕을 향해 끝없이 추적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굉장히 간단한 플롯이지만 이것이 500 페이지 가량되는 책 2권 분량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중반부까지 가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걸 과연 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게 이 책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고래를 향한 예찬을 끝없는 수식어와 형용사, 끝나지 않는 문장들을 사용하며 이뤄낸다. 한 문장을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생각하며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도 많고, 엄청난 은유와 비유를 사용한 탓에 역주와 각주 없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지식이 놀라우리만치 방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은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해브 선장이 과연 모비 딕을 잡을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이 아니라 허먼 멜빌이 이 책 속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세상에 대한 통찰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통찰은 배의 선원의 말을 통해서 나타날 때도 있고, 고래를 분석하며, 바다를 분석하며 나타날 때도 있다. 이해가 안 가는 통찰도 있고, 마음에 딱 꽂히는 내용도 존재한다. 성경의 말씀은 수도 없이 인용이 되기도, 다른 인물들의 말에 의해 조롱되기도 한다(신성모독이라기보단 성경을 세상에 빗대어 해석하는 본인의 능력이 엄청나 보이는데,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한 이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책이 별로 안 팔리기도 했다는 말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더욱 궁금해졌기에 이 이야기의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걸까. 그저 고래에 대한 논문이었으면 책 표지는 빠르게 덮였을 거다.


오오 인간이여! 고래를 찬양하고 고래를 본받을지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곳에 속하진 마라.
적도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극지에서도 피가 흐르게 하라.
성베드로성당의 거대한 돔처럼, 그리고 거대한 고래처럼.
오오 인간이여!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
<모비 딕> 中


고래의 모든 부분을 해체한다. 그들의 호흡, 머리, 몸통, 꼬리, 눈알, 체온, 뼈, 기름, 단체생활, 식습관 등 정말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작가가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지만 역시나 작가는 과거에 포경선을 타면서 직접적으로 고래잡이를 해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에 대한 엄청난 조사를 바탕으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필을 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고래가 그저 포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고래잡이에 대한 내용도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작가, 여기서는 이야기의 전달자인 이슈미얼,는 전혀 고래를 하찮게 대하지 않는다. 정복의 대상인 고래는 그 자체로 찬양받아 마땅한 위대한 생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고래를 잡는 포경업 또한 위대한 자들로 보인다. 물론 이슈미얼이 승선한 피쿼드호에는 다양한 인간 종류들이 있지만 그들의 지위, 인성과 상관없이 위대한 리바이어던을 잡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을 책 끝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래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설명하고 이야기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바이어던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은 가라앉는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피쿼드호의 선원들처럼.


matthias-wesselmann-9Jx37xwFX6c-unsplash.jpg
고래처럼 거대한 존재가 그처럼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토끼 귀보다 작은 귀로 천둥소리를 듣는다니,
그것 참 기이한 일 아닌가?
하지만 고래의 눈이 허셜의 거대한 망원경에 달린 렌즈만큼이나 크고
귀가 대성당의 현관만큼이나 널찍해진다면 고래는 더 멀리 보고 더 선명히 듣게 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마음을 '넓히려고' 애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예민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을.
<모비 딕> 中


바다라는 신비한 곳은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곳임을 내포하는 내용도 있는데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관점이 인상 깊다. 죽음을 기다리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바다로 나가게 된다. 끝없는 수평선에서 죽음을 발견하지만 하루하루를 보냄으로써 희망을 찾아나간다. 섬에서 태어난 나에게 바다는 어떤 곳이었을까. 수평선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한한 희망과 동시에 무한한 정적, 차분함 가운데의 무(無)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어떨 때는 무한한 위로를 받는다. 세상은 그저 이토록 차분하고 아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가끔씩 깨우친다.


이러한 바다에서 사는 가장 큰 고래라는 생물. 그 종류도 너무 많고 아마 인간이 이에 대해 다 알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싶다. 아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경외의 대상들은 모르는 채로 남겨져야 더 좋을 때가 있기에. 바다라는 신비 속의 고래라는 경외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단지 이 조용히 넓고 아득한 바다를 헤엄치는 동물을 통해서 인간인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길 바랄 뿐이다. 에이해브처럼 분노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 것인지, 쿼퀘그처럼 삶과 죽음에 통달하여 살아갈지, 목수처럼 삶에 있어 필요한 능력은 다 있지만 인생의 즐거움을 잃고 살 것인지, 스터브처럼 즐거움을 가지고 살 지, 핍처럼 두려움에 떨다가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릴지, 스타벅처럼 반대하고 들고 일어서야 할 때 할 말을 할지. 인생은 너무나도 여러 면모가 있고 사람도 너무 다양한 면모가 있다. 그 와중에 홀로 생존한 자는 추방자, 사회에 버려진 자인 이슈미얼인 것을 보았을 때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살아갈지.


인생은 정말이지 앞을 알 수 없는 항해일 뿐이고 그 항해는 지금 막 시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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