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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공 Apr 20. 2022

취업준비생으로 살아남기 02- 취준생의 밥벌이

저도 출근하거든요? 카페로.


적응이 빨라요. 시간 약속을 잘 지켜요. 장기간 근무 가능해요.


 아르바이트를 지원할 때는 최대한 많은 장점 항목을 선택했지만, 그중 제일 자신 있던 것은 장기간 근무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무 살은 왕복 두 시간 반 거리의 에뛰드 하우스 알바를 1년 가까이했고, 마지막 근무 바로 다음 날부터 왕복 한 시간 거리 서점으로 출근했다. 손님의 한 마디에 당황해서 귀까지 빨개지고 집에 돌아와선 못해먹겠다고 울었지만 … 그래도 버텼다. 서점 아르바이트는 2년을 채우고 교환 학생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다.


 1년의 유학을 마치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는 걸어서 5분 거리로 교통비도 들지 않았고 시간대도 좋았다. 면접을 보고, 합격! 교육을 받고 바로 출근을 시작했다. 복잡한 레시피로 악명 높았던 만큼 초반에는 헤매기도 했지만 금방 적응했고 기계적으로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일 미들 타임으로 출근했으나 운 좋게 주말 오픈 타임으로 옮겨서 학업과 병행할 수 있었고, 근무 시간이 늘어나 주휴수당도 나왔다.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근무 조건. 이번에는 얼마나 근무했냐면 … 올해로 3년, 매장에서 제일 오래 근무한 최고참 알바되시겠다.

 완벽하게 썰어놓은 슬라이스 과일들. 신선한 과일을 예쁘게 썰어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기상 시간도, 취침 시간도 내 마음대로인 백수 취준생에게 출근이란 소중한 것이다. 주 3일뿐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이른 시간 일터로 나간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매주 유니폼을 세탁해서 정리해 두고 출근 전 날엔 카페인도 자제한다. 나도 출근한다. 나도 노동을 한다. 나도 월급날 있다!

하루 동안 지저분하게 변한 소스 통과 과일 통을 깨끗이 비우고 말린 후에 채워둔다. 내 손길이 닿은 후에 깔끔히 정리된 파우더 통들과 시럽 병을 보면 묘한 만족감이 들었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끝낸 후 퇴근하면 뿌듯했다. 내 매장도 아니면서 열심히 관리했고 다른 직원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섬세하게 신경 썼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면서 성취감을 느끼며 차곡차곡 자존감이 쌓였다. 나만의 레시피로 내려먹는 한 잔의 아이스 라테가 행복했다. 얼마나 근무했냐는 물음에 3년이 다 되어간다고 말할 때도 내심 자랑스러웠다. 한 곳에서 진득하게 일하고 무엇이든 꾸준히 하는 것이 나의 장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환 학생을 마친 직후부터 시작해서 대학교 4학년, 졸업 후 취준 시기를 함께한 카페 아르바이트는 그만 둘 시기가 명확했다. 어딘가에 취직을 하거나 다른 일을 시작하면 그만둬야겠지. 대학생 때부터 세워놓은 나의 계획이다. 그렇게 취준이 길어지면서 슬슬 불안해졌다. 이렇게 오래 해도 되는 건가 …? 옅은 불안감이 일었지만 어쨌든 출근했다. 언젠가는 당연히 취업을 하겠지. 그전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상을 잘 누려보자.

 

 그러다 카페에 아는 친구가 왔다. 집 근처 카페인지라 초등학교 졸업 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친구들이 손님으로 오는 경우는 왕왕 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숨고 싶었다. 서로 아는 사이지만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는 애매한 사이를 손님과 점원으로 마주하니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아직 취업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만 한다고 생각할까 봐(사실이지만) 부끄러웠다. 얼굴은 빨개지기 시작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갈 곳이 어디 있는가. 속으로 애국가 부르며 진정시켰다. 묘하게 풀 죽은 상태로 퇴근한 그날엔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그 친구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데다가 높은 확률로 나에 대해 아무 생각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당황했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해서겠지.


 내 나이 스물여섯,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늦은 나이도 아니다. 학교 생활에 나름대로 충실했고 필요한 자격증도 하나둘씩 채워나갔지만 불안감은 별 수 없었다. 올해 꼭 취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니 하루가 갈 때마다 초조해졌다. 조금 느리더라도 내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불현듯 찾아오는 절망감에 다시 무력해졌다. 분명히 카페 아르바이트는 나한테 생기를 주곤 했는데! 같은 상황임에도 마음가짐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를 더 오래 한다는 것이 곧 취업 준비 기간의 장기화로 느껴질 때마다 가슴에 돌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냥 그만둬버리고 취업 준비만 할까 고민해 봤지만 그러기엔 무력함에 지는 것 같아 안 되겠다. 첫 알바는 먼 거리가 힘들었고 두 번째 알바는 진상 손님의 폭언에 울었지만, 아마도 내 마지막 알바가 될 카페 아르바이트는 이게 고비인 듯하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버텨내겠지. 기어코 취업을 하고 점장님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날이 오겠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나는 취업 준비용 자기소개서에 자신 있게 한 줄을 쓴다. 장기 근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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