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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n 07. 2023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벌써 일 년



오늘 그대가 결혼한 지  년째 되는 날이군요.

내키지 않는 억지 축하라도 해야 할까요?

한심하지요, 그대의 기억은 어느 정도 고갈된 줄 알았는데 그대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다니요.


다시는 그대 생각 안 하겠다던 결심도 허물어지고

정신없이 보고 싶을 땐, 그대가 멋있다던 카키색 낡은 잠바를 입고 외출을 해요.

아기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한껏 어깨를 접은 채 바람 부는 골목길을 숨죽이며 쏘다녀요.

지나온 골목길엔 그대를 질투하며 원망했던 더러운 편린들만 부유하고 있어요.



목련여인숙


비루한 청춘들의 성지 목련 여인숙.

어제 떨이로 팔았던 그림값으로 물감 사고, 화실세 내고도 조금 남아 목련 여인숙으로 갔지요.

그곳에 가면 잠시라도 그대의 생각에서 멀리멀리 달아날 수 있어요.

목련 여인숙의 문을 여는 루저들은 결핍과 열등감에 배불러있고, 사랑에는 허기져 있지요.

그중에서 내가 결핍 대장이에요.

여인숙 안내실 골방에서 들리는 가브리엘 포레의 청승맞은 첼로곡, 저 여자는 저곡밖에 모르는지 계속 한 곡만 리플레이돼요.

덕분에 여인숙이 장송곡 들리는 거대한 무덤이

돼버려요. 

앙증맞은 요구르트와 돌돌 말린 수건 한 장을 밀어주며 '오늘도 살아 있군요.'

큰 눈으로 비꼬는 여주인도 기분 나쁘지 않아요.

나는 내일도 어떻게든 살아볼 요량이거든요.


장미 꽃무늬 벽지가 도배된 목련 여인숙 205호

오른쪽 벽 너머에서는 장기 투숙한 남자들이 화투를 치다 피박을 썼는지, 큰소리로 화를 내며

화투장 내던지는 소리가 들려요.

왼쪽 벽 너머에서는 미세하게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도 부끄럽게 들리죠.

그대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엔 스테레오로 들리는 양쪽 옆방의 모든 음성들이 통곡처럼 느껴져요.

심지어는 검지와 중지의 신경을 잃어 첼로의 현을 잡지 못한다는, 쌀쌀맞은 목련 여인숙 여주인까지도 불쌍해요.


여인숙에 상주하고 있는 늙은 천사가  딱딱 껌을 씹으며 슬리퍼를 끌고 와요. 

천사가 마음에도 없는 값싼 위로와 딸기향 나는 키스를 하고 성의 없는 포옹도 해요.


목련 여인숙 이름에 맞게 목련꽃 봉오리가 하얗게 터지고 백목련 꽃잎이 나비처럼 날아다녀요.


나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꽃길을 산책해요.


옥탑화실로 돌아와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을  올려다보며 잘 다녀왔다 인사를 해요.

소피아 로렌이 측은하게 내려다보며 물어봐요.

"그녀에게 축하는 안 하실 건가요?"



고백


미안해요. 골목길을 걸으며 잠시라도 그대를 미워했던 나를 용서해 주세요.

결혼 주년 축하드릴게요

제발 그대가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대의 안녕을 비는 내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을게요.

이제는 그 정도로 철없지도 않고 시간도 많이 흘렀잖아요.

그냥 가끔, 아주 가끔 몸서리치게 보고 싶을 뿐이에요.

이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우겨볼게요.

오늘도 전철역의 첫차 소음을 듣고 말았어요.


언제쯤이면 불면에 중독돼 버린 밤이 끝날는지

암담하기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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