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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n 20. 2023

새로운 인연

병아리를 주워온 여고생

                         

"전철역 2번 출구에서 보시면 역전다방이 보입니다. 맞은편 목련 여인숙 골목으로 쭉 들어오세요. 계룡 점집 간판 앞에서 멀리 3층 건물 옥상에 해바라기가 보일 겁니다. 그리로 올라오세요."

며칠 전부터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 하나가 화실을 보고 싶다며 당돌하게 매일 전화를 한다.

보호자와 같이 오라고 허락을 했다.


지금 맺고 있는 인연들도 나는 버겁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관계 속에서, 친하다는 미명아래 하나같이 상처 주기에 바빴고, 어쩌다 내가 먼저  등을 돌리면 깊은 죄책감으로 남았었다.

오늘 방문자들이 1그램도 안 되는 가벼운 인연이길 바랄 뿐이다.



여고생 민지


오빠와 여고생이 도착했다.

큰오빠 김동혁 여고생 김민지 해바라기 앞에서 서로 인사를 했다. 해바라기도 소피아 로렌이라고 소개를 해줬다. 민지가 해바라기를 보며 '안녕 소피아로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민지의 큰 오빠는 나랑 동갑이고 민지는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민지가 조그만 박스를 내밀었다.

안에는 노란색의 병아리 한 마리가 울지도 않고 앉아있었다. 지하철역 화단 꽃밭에서 다 죽어가던 병아리를 주웠다고 한다.

 "이걸 어쩌라고?" 

"누가 버렸나 봐요. 우리 집엔 키울 환경이 안 돼서요. 여기는 옥상이라 최적의 조건 같아서..."

민지가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옥상의 환경으로 따지자면 황소도 키울만한 조건이긴 하다.

커다란 라면박스에 옮기고 물과, 쌀을 잘게 빻아서 넣어주었다. 잠시 후 신기하게도 삐약삐약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동혁 씨! 우리 나이도 같은데 친구 합시다. 말 놓으세요. 민지도 오빠라고 불러라." 동혁이 그러자고 한다. 민지는 수줍게 웃었다.

"민지야! 우리 화실 지저분하지?"

"제가 생각했던 화실 그대로예요. 입시학원처럼 좋은 위치에 깨끗한 화실이었으면 실망했을 거예요. 지저분해서 좋고 소피아 로렌 소개해 줘서 고맙고 그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어도 빛이 나는 여고 2학년, 민지의 성격은 전화 목소리와 같이  밝고 맑았다. 비밀의 숲에서 병아리와  날아온 예쁜 요정이었다. 요정이 화실 구석구석을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요술봉 대신 목탄을 들고 두 오빠들을 모델로 크로키를 한다거나, 스케치만 해놓고 처박아둔 캔버스를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입시미술을 해서 그런지 소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술 좋아하나 본데, 친구 만난 기념으로 낮 술 한잔해야지. 분명 냉장고에 소주가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보고 동혁이 웃으며 말한다.

동혁. 호탕하지만 예의 마르고, 수수하지만 기품 있는 외모였다. 술을 마시면서도 동혁은 한시도 민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거의 딸바보 아빠 같았다.

"민지가 미술학원 다니고 있는데 스트레스 많이 받나 봐. 입시학원에서 배우는 건 그림이 아니고 미대 가는 기능을 배운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내년에 시험 보려면 안 다닐 수도 없고, 쟤 대학교 졸업하면 미국이나 프랑스로 유학 보낼까 해. 좋은 화가 오빠 생겼으니까 귀찮더라도 민지 졸업할 때까지 잘 부탁한다."

동혁은 막냇동생 유학 보내려고 5년 후에 만기 되는 적금도 들었다고 한다.

"오빠 노릇은 하겠지만 병아리는 어떡할 거냐?

며칠 못 살고 죽을 텐데." 

동혁도 난감해했다.

"오빠! 병아리 잘 있나 매일 전화드릴게요. 다음에 올 땐 병아리 먹을 벌레도 사 올게요"

병아리에게 물을 갈아주며 민지가 또 부탁을 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더 있겠다는 민지를 데리고 동혁이 조심스럽게 녹슨 철계단을 내려갔다. 괜히 숙연해졌.



모네를 좋아한다는 민지


버드나무 그늘진 벤치에 앉아있던 모네도 요정 민지가 무사히 졸업하고, 부디 프랑스로 유학 오길 손 모아 기도할 것이다.

수련이 꿈처럼 떠다니는 연못과, 꽃들의 정원에서 흰 수염의 할아버지 화가와 산책하는 민지를 생각하니, 괜히 흐뭇해졌다.

오후 네시의 건초더미 앞에서 빛과 그림자를 그리는 두 화가를 세잔도 부럽게 바라보겠지.


오늘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인간이 아닌 요정과 연이 닿았으니 적어도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겠다.


요정과 호위무사가 지나간 골목길엔

술 취해 소리 지르던 주정뱅이 김 씨도 잠이 들고

결막염 걸렸던 희미한 외등도 환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민지의 마법에 걸린 골목이었다.


형광등을 끄자 라면 박스 속에서 시끄럽게 모이를 쪼던 노란 털뭉치 기특하게 조용해졌다.

작은 입김에도 부서질 것 같은 여린 생명체.

교만한 만물의 영장이 위로를 받는지, 이상하게도 오늘밤은 외롭지 않았다.

내일은, 밖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닭장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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