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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l 18. 2023

노란 독수리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33art/329

                                            

안식처를 찾지 못한 유령처럼 새벽마다 골목길을 떠돈다. 습관이 돼버린 불면의 밤.

골목길엔 어느새 가을이 당도해 있고, 사고가 빈번한 사거리 신호등은 황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유배당한 두 목숨


화실로 돌아와 이젤 앞에 앉지만 민지가 주워온 병아리만 자꾸 쳐다보게 된다.

역 앞의 화단에 버려져있던 유기된 병아리.

왕따 당한 생명. 누가 버렸는지 목이라도 조르고 싶다. 죽어가던 병아리가 억겁의 시간을 건너 나와 연이 닿았다면 기적과도 같다.

민지의 간곡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 잘 키워보기로 한다.

생명의 경중을 따진다면 내가 병아리보다 중한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라면박스 안에서 쉬지 않고 모이를 먹는 병아리. 먹다 지칠 것 같다. 어떻게 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박스를 쪼던가 악을 쓰며 삐약 댄다.

시끄러워서 라디오의 볼륨을 올린다.

쌀집에서 얻어온 좁쌀 한 줌 놓아준다.

닭장을 만들어야겠다.

노란 털 뭉치가 커질 것을 생각해서 공작새도 살 만큼 크게 만든다.

닭장을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옆에 놓았다.

이제는 가을, 소피아 로렌 얼굴은 점점 커지고 주근깨 까만 얼굴로 노란 병아리를 내려다본다.

닭장을 너무 크게 만들었는지 병아리가 더 작아 보인다.



작명가


그날 오후 민지가 큰오빠 동혁과 방문했다.

민지가 기뻐한다. 닭장에 문패도 달아준다.

'노란 독수리의 집'

"지금부터 네 이름은 노란 독수리다."

민지가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림 그리는데 방해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괜히 주워와서 미안하다."

동혁이 멋쩍은 듯 웃었다.

"오빠 고마워요. 저 여기 자주 놀러 와도 되죠?

올 때마다 노란 독수리 먹이 사 올게요."

민지가 병아리를 꺼내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발밑에 놓아주자, 본능인지 작은 발톱으로 흙을 파고는 계속 쪼아댄다.

민지가 병아리를 크로키한다.

여고 2학년 민지는 여전히 입시미술 학원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민지의 고민과 꿈은 이해하지만, 미대는 입학해야 하니 뭐라고 해줄 말은 딱히 없었다. 열심히 하라는 속물 같은 말밖에는...

큰오빠 동혁도 학원 가기 싫어하는 민지 때문에 난처해하는 눈치다.

다행히 옥상 화실에 오면 자유를 느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부디 보잘것없는 나의 화실에서 위안이라도 얻길 바랄 뿐이다.



존재의 불안


자려고 야전침대에 누웠다.

문득 옥상 난간에 앉아 병아리를 노려보던 얼룩 고양이의 차가운 눈을 기억한다. 닭장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 괜찮겠지. 눈을 감았다.

'야옹'

길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

젠장, 불안하다.

밖으로 나와 병아리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짙은 담배연기가 절집의 향냄새처럼 무겁다.

닭들은 밤에도 전등만 켜놓으면 잠을 안 자고 계속 먹는다고 했는데, 어두워서 그런지 넓은 닭장 구석에 옹크리고 있는 노란 독수리. 잠을 자는 건지 고양이가 무서워 자는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라면 박스에 담아서 야전침대 옆에 놓았다.

밝아서 그런지 또 모이를 먹으며 삐약 거린다.

불을 껐다.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하다.

"내일 새벽에 외출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알아."

허공에 대고 말한다.

알아들었는지 한번 부스럭거리곤 이내 잠잠하다.

'노란 독수리' 좋은 이름이다.



병아리의 꿈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몽골의 바람 속, 황금날개를 가진 노란 독수리의 꿈을. 바람 타고 비행할 땐 조랑말을 탄 유목민이 몸을 떨었고, 토끼를 쫓던 여우도 굴속에서 두려워한다. 초원의 생쥐 한 마리까지 선명하게 보이지만, 사냥은 하지 않고 구름 없는 파란 하늘만  맴돌고 있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고 금빛으로 반짝이는 날갯짓도 멈추질 않았다.


꿈을 깼을 땐 새벽 두 시.

추락한 독수리가 라면 박스에 갇혀있다. 자유를 박탈당한 비루한 날개를 접고 선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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