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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준 Apr 16. 2023

달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갈 그대들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를 읽고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불안은 ‘알 수 없음’에서 온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경험과 이성의 예측 범위에서 벗어난 것들을 상상할 때 우리는 쉽게 불안을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불확실한 ‘미래’는 더욱 현재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2023년의 우리는 곧 네온등 사이사이로 메아리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2024년에 펼쳐질 삶에 대한 불안에 잠식될 것이다. 내년의 청사진을 하나 둘 꺼내어 보면서도 어떤 삶이 펼쳐질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곧 종이 울리며 2024년을 맞이할 것이고, 또 2025년에 대한 불안을 마주할 것이다. 한 해뿐만 아니라 우리는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몇 년 후에 대한 불안을 늘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늘 우리는 불안에 휩싸여 미래로 끌려가는 비극적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불안에 맞서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불안의 속박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여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계획하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나의 예측과 통제에서 벗어난 곳곳의 일들에 용서와 자비를 갈구하면서도, 단념할 것은 단념한 채로 사소한 일탈과 해방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책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 혼돈과 아이러니에 대하여

 ‘진주의 결말’에는 사이렌을 울리면서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TV프로그램인 ‘사건의 결말’이 언급된다. 이 TV프로그램처럼 현대 사회의 매스컴은 끔찍하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앞다투어 우리 앞에 전시한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 현재의 비극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과 끔찍한 사건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을 우리 머릿속에 심는다. 이와 더불어 책 전체에 걸쳐 여러 번 언급되는 ‘세상은 내면의 거울’이라는 관념 때문에, 불안이 내재된 우리의 관념이 그려내는 세상은 어딘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매스컴과 내면의 불안, 그로 인한 세상의 요동, 우리의 외부와 내부에서는 ‘준비하지 않으면 너의 미래는 끔찍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직조해 내기 시작한다. 불안은 서서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또 빠르게 자라나 미래의 세상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난주의 바다’에서 자식을 잃은 손유미(은정)의 삶처럼, ‘진주의 결말’에서 진주의 아버지에게 사전 경고도 없이 갑자기 치매가 찾아온 것처럼, 예고 없이 불행을 불러오는 현재의 세상도 미래의 세상 못지않게 이미 두려운 존재이다.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불행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불행이 닥쳐온 원인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기에 세상은 아이러니로 느껴진다.


 이처럼 특별한 인과 과정 없이 찾아오는 불안에 맞서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소설 속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불안의 근원들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카오스적 존재로 거듭나는 ‘진주의 결말’의 진주처럼, 세상을 불안 없이 마주하려면 그동안 쌓아온 내면의 불안에 불을 질러야 할지도 모른다. 진주는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혼돈과 카오스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자 한다. 진주처럼 우리는 우선 아이러니 자체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기본값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세상은 이미 혼돈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곳이고 우리의 미래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을. 계획한 대로, 예측한 대로 세상은 절대 작동하지 않으며 카오스적이며 아이러니한 것이 우리의 삶이자 미래라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오만하게도 계몽되었다고 믿으며 이성의 잣대로 상식과 이해라는 틀을 만들어 그 틀을 벗어난 모든 것들을 아이러니라고 치부하고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손바닥 위에서 재단하고자 애썼고 그것이 곧 주체적인 삶의 실천이라고 오해해 온 것은 아닐까. 오히려 진정한 주체적 삶은, 세상과 미래가 아이러니와 혼돈으로 가득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 등장하는 사막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삶을 더욱 척박하게 뒤흔드는 모래 폭풍도 곧 지나가리라는 사실을. 곧 지나가는 모래 폭풍 같은 불행과, 혼돈과 아이러니 역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엄마 없는 아이들’에서 명준과 혜진이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를 받아들인 이유는, 두 사람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점이 아니라 ‘상실’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상실을 ‘잃어버림을 얻는 일’로 승화시켰고, 혼돈과 아이러니를 삶의 일부로 맞이하였다. 그동안 삶의 아이러니와 혼돈, 불안에 대해 현대 사회가 비관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왔다면, 이제는 사막의 사람들과 명준, 혜진처럼 낙관주의적인 삶의 관점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는 모두 필요하다. 비관적이어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꾸는 일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낙관적이어야 삶의 불행을 흘려보낼 수 있다고 한다. ‘카타무 호갸’, 흔하게 내뱉곤 하는 ‘다 끝났어.’라는 풀 죽은 말 자체도 사실 비관적이지 않다. ‘모래 폭풍이 지나갔다’, ‘불행과 혼돈이 끝나 지나갔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담긴 이야기는 어느 순간 아이러니와 혼돈이 번갈아 찾아오는 우리 삶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이러니 자체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기본값이다. 이 사실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으리라.

 

 2. 비선형적인 세계에 대하여

 책에 담긴 모든 단편들은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할 수 있는 시간의 틀 속에서 미래를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가 현재의 근간이며 현재 역시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라는 선형적인 세계관에 익숙하다.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나의 행동과 성취가 미래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소설들 속에서는 이러한 연속성을 끊어내거나,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인과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진주의 결말’에서 불행의 개연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삶 자체에 불을 질러버린 유진주가 그렇고, ‘난주의 바다 앞에서’에서 새로운 삶의 바람인 ‘세컨드 윈드’를 경험한 은정과 ‘엄마 없는 아이들‘의 명준과 혜진도 그렇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선을 끊어내며 지난날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시간을 넘나들며 과거와 미래 속에 살아가는 바르바라와 소통하고,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서의 그는 시간이 겹겹이 쌓인 지층을 발견하며 나의 삶이 곧 공룡의 화석처럼 될 것임을, 삶과 삶들이 무한히 겹쳐지는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덧없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는 나와 지민이 미래에서 현재로 역행한 뒤, 미래의 모든 기억을 품고 다시 현재의 시점에서 살아가는 세 번째 삶에 대해 가늠해 본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업보가 미래로 이어진다는 선형적인 세계, 그러한 시간관과는 거리가 먼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인물들의 삶의 자세가 담고 있는 공통적인 메시지는 하나. 미래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것. 내가 벌여놓은 과거나 현재의 삶이 미래를 거미줄처럼 수놓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비선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에는 아직 갈 수 없지만 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듯이, 언젠가 달까지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상상할 수 있듯이, 미래는 수많은 오늘의 가능성 중의 하나이고 수많은 오늘들처럼 평범하다. 카지노 룰렛에서 나올 수 있는 수가 00, 0부터 36까지의 숫자 중 하나이듯이, 미래는 수많은 오늘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두려워 말자. 불안을 통제하고자 미래를 옷감 짜듯 계획하는 것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3. 평범한 미래를 살아갈 그대들에게

 첫 단편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로 시작하여 마지막 단편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로 끝나는 구성은, 그 자체로 서사를 이루며 구조적 안정감을 형성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는 소설 전반이 담고 있는 미래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는 앞의 소설들에서 밝혔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의 가능성들을 총 정리하는 느낌이다. 각기 독립적인 단편집이지만 그저 단편들을 모아놓고 공통점을 뽑아 제목을 지은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하나의 주제로 짜인 장편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찾아오리니, 다시 2100년의 나 또한 그런 세상을 살아갈 것이니, 삶의 불행을 겁내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불행이 불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혼돈과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것이 미래의 기본값임을 인지하고, ‘세 번째 삶’이든 ‘세컨드 윈드’이든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과 인과성을 끊어내며 의연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와 ‘사랑의 단상 2014’에서는 사소한 기억의 단상이 세상과 삶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순간 모든 것은 옛사랑을 기억해 내는 일처럼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의 업도 현재의 노력도 아닌 미래의 우리 모습, 혹은 세상을 떠날 때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질문한다. 과거의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냐고. 미래를 기억하고 미래 그 자체를 인식해 보자. 존재의 크기는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한다. 앞으로 수많은 미래를 상상하며 생생히 기억할 수 있기를. 수많은 오늘의 가능성들 중 하나인 미래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그럼으로써 수많은 오늘의 세계를 인식하는 커다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팬데믹과 참사의 아픔을 안고 사랑과 노력을 건 도박에서 여러 차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게 될 것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이다. 우리의 판돈은 살면서 내쉬는 숨결의 총량만큼 유한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는 무한하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카오스의 세계에서 불행의 늪에 드러눕게 되어도 다시 찾아오는 삶의 바람인 세컨드 윈드를 기다린다면, 0점의 성적표를 받더라도 0에서 100까지의 가능성에 대해 기억한다면, 하루가 지날수록 미래에 우리가 원하는 삶이 다가올 확률은 점점 100%에 수렴할 것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길.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더라도 그저 받아들일 수 있길. 불행도 모래 폭풍처럼 지나가리라는 것을 인식하길. 그리고 혐오와 사랑의 세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길. 어둠과 빛의 가능성 중에서 달에게 닿는 빛의 길을 선택하기를. 세 번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의연하게 고개 들어 살아가기를. 새로운 바람은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그대들에게로 불어올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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