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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혁 Mar 06. 2024

라벤더

20

수아가 태우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뜬 태우가 몸을 일으키자, 수아가 태우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새 가면을 쓴 아이가 있어요. 저기..."


수아가 가리키는 손끝에 아이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라벤더가 피어있는 길을 따라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고, 달빛이 어두운 길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 것을 보면 자주 왔던 길인 것 같아요. 저기 농장 표지판 보이세요?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예요."

"여기가 피해자들이 묻힌 곳일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철에겐 의미 있는 장소일 거예요."


보라색 라벤더 길을 벗어난 아이가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아와 태우도 아이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 때문인지 숲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지만,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워하는 두 사람 앞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나타났다.


"전에 봤던 분들이군요. 내가 돌아가라 충고했을 텐데 잊으셨나 봅니다."

"사정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시죠."

"이번엔 그럴  없죠. 지금 이곳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후회는 우리가 감당하죠. 더 이상 할 말 없다면 우린 가겠습니다."


여자를 지나친 두 사람은 숲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활이었기에, 그들은 숲이 깊어질수록 불안한 마음도 깊어지고 있었다. 나직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수아의 발걸음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끌리 듯,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새 가면을 쓴 아이가 다.

아이는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속에 잘리고 찢긴 인형을 던져 넣고, 삽으로 파헤쳐진 흙을 끌어와 구덩이를 메우고 있었다. 아이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 숨어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숙인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손에 삽자루를 든 남자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기철이었다. 기철은 다급하게 일어서는 태우를 향해 삽자루를 휘둘렀고, 머리를 가격 당한 태우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아니 태우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녀의 힘이 되었고, 수아는 사력을 다해 기철을 언덕 아래로 밀어 버렸다.

수아는 쓰러져있는 태우를 살폈고, 다행히 정신을 차린 태우가 수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기철은 소름 끼치게 끔찍한 괴물로 변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삽자루를 집어든 태우가 괴물에게 달려들며, 삽 모서리로 힘껏 내려쳤으나, 괴물의 강철 같은 앞발에 일격을 당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위급함을 느낀 수아가 쓰러져 있는 태우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기철의 꿈에서 빠져나왔다.

태우의 꿈속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천정 객실에서 복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아는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태우는 쓰러진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천정 객실문이 박살이 나며, 파편들이 복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아와 태우를 따라온 괴물이 객실 문을 부수고 복도로 내려온 것이었다.

태우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수아 홀로 기철과 맞서야 했다. 그동안 태우의 꿈속에서 실전 같은 연습을 수없이 했었지만, 기철과 맞선다는 것은 수아에겐 두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수아가 전사의 모습으로 변하며 칼과 방패를 들었다. 괴물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수아는 방패를 사용해 잘 막아내고 있지만, 괴물의 강한 힘에 밀리며 방패를 떨어뜨리게 된다. 칼 한 자루에 의지해 괴물에게 맞서던 수아가, 괴물의 날카로운 발톱에 갑옷이 찢기며 바닥에 쓰러졌고, 괴물은 약한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수아의 숨을 끊으려 이빨을 드러냈다. 바람 앞 등불 같았던 그 순간, 소리 없이 날아든 차가운 검날이 괴물의 살을 깊게 베었고, 고통 속에 포효하던 괴물은 라벤더색 복도 위로 붉은 피를 쏟아내었다.



21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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