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면 민서에 대해 충분히 암시가 되었을 거예요. 이제 진정시키시면 제가 들어갈게요.]
강형사는 인이어에서 들려오는 서하박사의 요청대로 흥분한 기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서하박사는 수면 유도제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환자분 안정이 필요합니다. 지금 치료해야 하니까 자리 좀 비켜주세요."
강형사는 경비요원들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며 병실을 나갔고, 경비요원들은 침대에 걸터앉은 기철에게 안대를 채웠다.
"이거 불편하게 눈을 꼭 가려야 합니까?"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여선생, 낯이 익은데, 우리 본 적 있나?"
주사하고 있는 서하에게 기철이 말을 걸었다.
"......"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수면유도제를 주사하는 서하의 손이 떨려왔다. 옆에 있던 경비요원이 치료 중에는 말하지 말라며 기철을 제제했고, 그사이 서하는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꾹 눌러 담고 있었던 감정들이 요동치며,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참혹한 그날의 기억. 그가 자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움에 떨던 그날의 감정들을 소환하고 있었다.
기철이 잠들자, 수면실에 대기하고 있던 태우가 수면액을 마시며 잠을 청했고, 반대 방향으로 놓인 소파에 기대어 앉은 수아도 눈을 감았다.
샹들리에가 눈 부셨다. 손바닥으로 빛을 가린 수아가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였다. 꿈속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수아가 태우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명이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긴 복도 양쪽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는데, 문 앞에 객실 넘버가 적혀 있었다.
"9901... 99층?"
수아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끔하게 정리된 객실 안에는 사람이 없었고, 엷은 커튼 뒤로 보이는 창밖엔 어둠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가려진 커튼을 손으로 치우며, 시계 추처럼 눈동자를 움직였다. 창밖에는 그 흔한 전등 불빛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유리창을 연 그녀가 땅거북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암흑으로 뒤덮인 세상은 바람조차도 불지 않았고, 빨려 들어갈 듯한 공포가 그녀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태우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랬지만, 그의 꿈속이라고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태우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서일까? 그녀는 숨겨진 문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막힌 벽을 더듬거리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던 그녀가 천장에 있는 객실 문 하나를 발견했다.
주변에 사다리 같은 도구가 없어서 올라갈 방법이 없었는데, 문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수아가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수아가 천장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태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참을 찾았어요. 이제 가야 돼요."
수아가 태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왜? 내 꿈속에 가려고?"
"네?"
"네가 뭔데 함부로 내 꿈속에 들어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태우가 일어서서 밝은 쪽으로 걸어오자 그의 얼굴에서 기철의 모습이 느껴졌다. 수아가 놀라며 뒤걸음질 쳤다.
"당신 여기 어떻게 왔어?"
그가 대답 없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아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시 쳐다본 태우의 얼굴에서 기철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아저씨?"
"그래 나야. 왜 그래?"
"아니에요. 잠깐 착각했었나 봐요."
수아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20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