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 순간의 배신, 그리고 타협
육아휴직 후 복직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여자가 애 낳고 나면 일에 집중을 못 해." "육아와 일, 둘 다 잘하는 건 불가능해."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나는 초인이 되기로 했다. 주 1회 출장은 기본, 밤샘 업무는 당연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하루 30분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감사히 여겼다. '이것이 워킹맘의 현실'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힘든 시간은 지나간다고 꼭 봄날이 나에게도 올 것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있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내 삶의 모든 초점은 '증명'에 맞춰져 있었다. 여자라서, 엄마라서 일을 못 한다는 그 편견에 맞서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상사의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 처음엔 승진이나 좋은 프로젝트 제안인 줄 알았다. 미팅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상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날씨, 가족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이는 잘 크고 있어요?"
"네, 덕분에요."
"회사 생활은 어때요? 힘들진 않고?"
그때 느껴야 했다. 이 대화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X 씨, 솔직히 말해서 회사에서는 당신이 예전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
"파트타임으로 전환해서 프로젝트 어시스턴트를 맡는 게 어떨까요?"
어시스턴트? 그건 사실상 '나가라'는 말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왜죠? 제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었나요? 제가 업무를 제대로 못 한 적이 있나요?"
목소리가 떨렸다.
"회사 결정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해고될 수 있어요."
그 순간 이해했다. 합병 후 인원 감축 대상 1순위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여자', 그것도 '아이가 있는 여자'.
***
"회사에서 당신의 능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 한마디가 내 세계를 무너뜨렸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밤 9시까지 일하고, 지친 몸으로 아이를 데려와 30분 만이라도 함께하려 애쓰던 나에게 던져진 폭탄선언.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이런 느낌일까.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귀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청천벽력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지금까지 아이랑 보내는 시간도 없이, 미친 듯이 일을 했던 나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렇지, 나는 회사에서 아무 존재도 아니다.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물건인 것을 지금에서야 알아버렸다. 이런 황당한 말을 듣고, 자존심도 정말 많이 상했다. 지금까지 일 중심으로 살았던 나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여자라서, 엄마가 되어서 능력 발휘를 못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짜 악에 받쳐 일을 했었다. 내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설에서 남의 손에서 커가고 있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성과를 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하루하루 견디고 버티어 왔었다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인종 그리고 성차별이란 것을 회사에서도 당하게 된다니.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말도 안 된 차별들을 난 감당 해야 했다.
내 인생을 회사가 결정한다. 내가 엄마로서 충분한 시간을 아이와 함께하지 않기에 회사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트타임을 권유한 것이란다. 누가 엄마이고 누가 내 아이의 부모인가?
상사와 면담 후, 참 많이 울었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어리석은 나의 자존심 때문에, 아이의 희생을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혼자 열심히 달려온 바보 같은 내가 이렇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 이게 현실이라고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 아이를 안고 더 오래 울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미안함에 또 울었다. 엄마의 성공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겼을 너에게.
***
그 후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다. 아니 달라져야 했다.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면담 한 달 후, 회사 상황이 급변했다. 갑작스러운 인력 부족으로 큰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필요했고, 그 자리에 내가 발탁되었다. 더 높은 급여, 보너스, 승진까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나는... 받아들였다.
상처받은 자존심, 배신감, 서러움을 모두 접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족이 이사까지 하며 내 커리어를 지원했다.
그렇게 회사의 노예로 다시 돌아갔다. 차별에 맞서 싸우던 강한 여성은 현실과 타협했다. 돈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돈의 노예가 월급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했다.
***
지금도 나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다. 언제 다시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발버둥 치지만, 완벽한 균형점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때로는 자문한다.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가?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는가?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내 결정, 내 책임.
그리고 이것이 수많은 워킹맘들의 침묵의 현실이라고 비겁하게 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