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바꾼 성주간과 예수의 부활

성삼일 전례의 의미와 시대적 배경

by 아마토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언급했지만 가톨릭에서 '40'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나이 산에서 준비한 40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해방 후 가나안으로 이동한 40년, 예수가 광야에서 단식했던 40일, 부활한 예수가 지상에 머문 시간 등이 있죠. 오늘날에는 40일간 각자 생활에서 나쁜 습관들을 고치는 다짐의 기회로 삼습니다.

사순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합니다. 역시나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전례력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입니다. 성주간의 절정은 예수가 제자들과 가진 만찬,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성삼일'입니다.


성삼일 일정표 예시

우선 성목요일에 있는 '주님 만찬 미사'는 성목요일에 이뤄지는 전례가 아닙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해가 지면 새로운 하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안식일(노동금지)이 되기 전 예수를 빨리 죽이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겁니다(요한 19,31 참고). 따라서 목요일 20시에 이뤄지는 미사는 성금요일 전야의 의미로 진행되는 겁니다(목요일 아님). 마찬가지로 성토요일 20시에 있는 '부활 성야 미사' 역시 일요일 '주님 부활 대축일'의 전야 개념으로 이뤄지는 거지 성토요일 전례가 아닙니다.

성토요일은 예수가 무덤에 묻힌 날입니다. 이날은 '주님 수난 예식'만 하고 미사는 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가 죽음을 맞이했기에 십자가를 가리고 제대의 보도 벗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1495~1498년, 벽에 유채와 템페라, 4.6x8.8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이탈리아 밀라노

하나씩 살펴보죠. 예수가 로마 병사에게 잡히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집니다(목요일). 그림처럼요. 매우 유명하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와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는 찾기 쉽습니다. 가운데 위치하며 뒤에 밝은 배경이 있어 후광(스포트라이트) 느낌을 줍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제자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놀라는 장면이 하나 나오거든요. 제자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수가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만찬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겸손, 봉사, 애덕을 상징하는 행위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합니다.

그림에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오른쪽에 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운이는 토마스입니다. 예수가 죽은 뒤 사흘 뒤 부활하는데 토마스는 믿지 않죠. 예수는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못 박힌 손바닥에도 손가락을 대보라고 합니다. 그 장면을 상징해 토마스를 그린 겁니다.

성 토마스의 불신(카라바조, 1601~1602), 캔버스에 유채, 107x146cm, 상수시 궁전, 독일 포츠담


예수의 왼쪽 분노 가득한 얼굴로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만찬 후 예수가 잡혀갈 때 베드로가 대사제의 귀를 잘라버리거든요.

예수를 팔아넘기는 유다는 손에 은전 서른 닢을 쥐고 있습니다. 그의 식탁 앞에는 조그마한 통이 엎질러져 있습니다. 바로 소금입니다. 소금은 약속을 상징하는데 믿음, 맹세가 깨졌다는 거죠.


유다의 입맞춤(1304~1306년),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예수의 바로 왼쪽에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소설 '다빈치 코드' 때문에 마리아, 또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제자 중 가장 어려 대부분의 성화에서 수염이 없는 앳된 소년의 상으로 그려진다고 하네요.


제대는 오늘날 성당에서도 재현됩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성전 가운데 통로를 지나갈 때, 전례 독서자가 독서대로 올라갈 때 깊은 절을 하는데 십자가가 아닌 제대를 향해서 합니다. 제대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 식탁을 의미합니다.


<최후의 만찬> 작품은 완벽한 원근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이 있어요. 멀어지는 건 일정한 비율대로 작게 표현하죠. 동시에 소실점(평행한 두 선이 만나는 점)을 보면 예수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역시나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림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건 예수라는 걸 소실점으로 나타냅니다.

이토록 그림에서 안정감을 주는 원근법이건만. 절대로 깨지지 않을 거 같았던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었건만. 나중에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됩니다. 특히 폴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는 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는 로마 병사에게 잡히고 십자가 죽음을 맞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이 신 행세를 했다는 겁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말과 행동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판단했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거 역시 인정할 수 없었죠. 로마의 입장에서도 예수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니 큰 세력으로 성장할지 몰라 걱정했을 겁니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유다인들의 요구를 결국 들어주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안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동조했던 겁니다.


여기까지 성주간에 대해 살펴봤어요.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알아보죠.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사도 바오로가 위 구절로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부활은 가톨릭 신앙의 토대이며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의 부활은 자연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증명하는 이가 있으면 사기꾼일 거예요. 설령 예수가 부활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걸 믿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나 열두 제자들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그럼, 부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먼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봐야 합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앞서 말했듯 우선 부활은 예전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나지 않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그 노안인 상태가 아닙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 부활하면 흉측한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한 예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부활 역시 영적인 변화를 거친다는 거죠. 그래서 부활 후의 모습은 전과는 달라 사람들이 바로 알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손가락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었던 거죠.

토마스의 의심이 일반적이죠. 무슨 말이냐면.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주장해서 실제로 얻을 수 없는 이익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질적으로요. 소요죄, 그러니까 반역죄로 처형된 사람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오히려 범죄자인 예수를 추종했던 제자들이라고 해서 잡혀서 처벌받았겠죠.


유다인들의 입장은 어떨까요?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습니다. 만약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 상대적으로 그들의 권위는 약해질 테니까요. 로마 총독도 현상 유지를 하고 싶지, 사람들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바라기를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걸 무마시키는 방법은 쉬워요.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증명되죠.


<예수님의 부활>,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 1560-1660년 作,산 페르난도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그러나 유다인과 로마 총독(본시오 빌라도)은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예수의 시신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부활이 예루살렘 지역에서부터 크게 퍼지고 있을 때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어요. 그저 한 것은 당시 무덤을 지키던 병사에게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거였어요.


빈 무덤 얘기를 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열두 사도는 성목요일 밤 예수를 모른 척하고 다 도망갔어요. 베드로는 세 번 예수를 부정했죠. 성금요일 예수가 십자가 죽음을 맞을 때 제자들은 외면했습니다(사도 요한 제외).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목숨을 건 선교를 합니다. 그리고 순교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본 적 없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그리스도교 선포자로 바뀝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오늘날 평등복지사회 실현의 바탕이 됐습니다. 최저생활 보장, 사회보험 같은 경제적,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정책. 무상교육, 보편적 의료. 공정한 보상, 휴식과 돌봄의 권리. 또는 조세 제도를 통한 부의 재분배, 차별 없는 세상같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됐습니다.


내용이 길었네요. 이상 천주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인 성삼일과 부활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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