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를 바라보면서
코로나19 대유행 시절. 전대미문의 호흡기 전염병이었다. 전염성이 높은데 치사율도 높아 세계보건기구에서 비상사태를 선포까지 했던. 우리나라엔 2020년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하고 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던 시간.
옷처럼 착용했던 마스크. N95. KF94. KF80
방문할 때마다 했던 발열 체크. 고열 수치가 나오면 바로 격리.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회적 거리 두기.
식당, 목욕탕, 카페, 체육시설은 밤 9시까지만 영업이 가능했었던.
오래지 않은 2020년대 초반의 풍경이었다.
그 이후 2024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눈 내린 어느 추운 겨울. 부모님 댁에 가는 도중 미술관에 들러 르네상스기 그림과 인상주의, 야수파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원래는 굳이 시간을 들여 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많은 인파에 밀려 정신없을 거 같았다. 직전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멍 때리며 전시 작품을 보고 싶어도 수많은 사람에 의해 그러지 못했던 경험이 떠올라서였다.
입구 밖에서 보니 생각과는 다르게 한산해 보였다. 주차장 역시 만차가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다. 시간도 있겠다 싶어 들어갔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껴안고 있는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가장 눈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는 램브란트의 작품도.
그러다 마르크 샤갈이 그린 '야곱의 사다리'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야수파의 선구자 중 한 명이라 그런지 강렬한 색으로 관심을 끌어모았다.
지금이라면. 저 그림이 뭐라고. 초등학생도 학원에서 오래 배우면 그릴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저런 그림도 경매에 나오면 몇백억을 호가하겠지.
그 몇백억의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예전엔 아주 잘 그리는 게 실력이었다면 잘 그리지 않아도 예술이 되는 시대를 연 작품. 그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상징의 가치다. 그 상징이 없었다면 못 그린 그림은 여전히 못 그린 그림일 뿐이고 초등학생이 그린 그림일 뿐이다.
다만 나에게 이 그림은 또 다른 의미로 관심을 끈다. 그림에서 언급되는 야곱 때문이다.
성경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스러운 조상이라는 의미의 '성조'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을 말한다. 아브라함이야 아들인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는 시험을 통과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에 이견이 없겠으나. 야곱의 경우는 다르다. <야곱의 사다리> 그림에 나오는 천사들은 야곱을 지켜주는 수호천사로 묘사된다. 그들이 사다리를 세우고 야곱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게 그림의 내용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저렇게 많은 수호천사가 천국을 안내할 정도면 야곱은 큰 선행을 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거다. 이스라엘 민족의 성스러운 조상이라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천사들이 지켜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야곱의 직전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형이었던 에사우로부터 유산 상속권(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 이사악에게는 자신이 에사우인 것처럼 보이게 해 맏아들을 위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었다. 그로 인해 형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외삼촌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는데 그 와중에 돌을 베고 누워 자던 중 꿈에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보는 게 바로 이 그림이다.
얄밉다. 너무 얄밉다. 야곱이 대체 뭐 잘한 게 있다고 수호천사들이 동행하며 그를 지켜준단 말인가. 기독교에서는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동양권 문화에서도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고 해왔다. 서구에서는 신데렐라. 동양에서는 콩쥐팥쥐가 있지 않던가. 그동안 착하게(?) 살았던 나는 뭐란 말인가.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림은 알려주는 것만 같다.
예전에 얼핏 들었던 칼뱅의 '예정설'이 생각난다. 신은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정해놨다고 하는 게 예정설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야곱은 착하게 살지 않았지만 신이 그냥 천국에 보내주기로 미리 찜해놨으므로 천사들이 나타나 저렇게 천국으로 인도할 사다리를 세우고 있으니 예정설을 뒷받침하는 그림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야곱이 싫었다. 어려서 배웠던 권선징악, 사필귀정, 인과응보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야곱이 여전히 싫을까. 그래. 싫다. 변함없다. 야곱이 싫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영화 해바라기의 명대사는 아직 나에게 유효하다(오태식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거다).
신의 섭리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만 판단하지 않는 거 같다.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포함해 전체적인 인생의 가치나 방향성을 본다고 할까.
야곱의 과거는 분명 훌륭하거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로 인해 당장은 나쁜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길게 보면 인생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게 야곱인 거 같고. 그게 사람인 거 같고. 그게 인생인 거 같다.
야곱은 이후 외삼촌 라반 밑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7년간 일한다. 그리고 또 속아서 7년을 더 일하고 품삯도 가로챈다. 그래도 야곱은 번성하게 된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에사우와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힘든 일이 많았다. 야곱의 딸은 겁탈을 당했고, 두 아들이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했고, 아내는 막내를 출산하고 사망한다. 첫째 아들은 야곱의 첩과 동침하는 막장을 저지르고. 살던 곳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자 이집트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야곱은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것. 바르게 살지 않았더라도 그걸로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평가는 건 옳지 않다는 거다. 그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질 거다. 그간 착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세는 데가 달라지면 보는 풍경이 달라지듯이 길게 보면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듯이.
인생이란 참 길고 험난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