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잡식

B. 마음이 머무는 곳들 #03

by 우드노트


여러분의 인생 영화를 소개해 주세요


인생 영화에 대한 질문은 역시 인생 맛집에 대한 이전의 질문만큼이나 답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역시 장르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음식을 먹을 때는 한 가지 맛으로 끝나는 식사, 즉 덮밥이나 면 같은 한 그릇 식사를 좋아하고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맛만 있다면). 그런데 영화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를 얘기할 때는 어쩐지 이 맛 저 맛 다 찍어 먹어보고 골고루 좋아하게 된다. 그러니 인생 영화를 꼽기보다는 좋아하는 영화의 스타일을 세 갈래 정도 꼽아본다.



첫째는 깨달음을 주는 영화다. 패터슨, 콘택트(arrival),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소울, 버드맨, 백 엔의 사랑 등이 있다. 깨달음이라곤 하지만 사실 내가 나태해질 때 경각심을 일으킬 정도의 깨달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 콘택트와 지나친 자책과 자학으로 능력을 얻으려고 하면 자멸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 버드맨을 제외하면 주로 꾸준히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영화들이다.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 있지만 꾸준함에 대한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한 인간이 꾸준하기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외압으로부터 방해받아도 그것을 극복하고 나태함을 이겨내기란 머리로는 알아도 몸과 마음은 쉽게 포기한다. 영화에 그렇지 않은 인물이 나오면 참 좋고, 특히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설명해 줄 때는 위로가 되고 자극이 된다.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더 그렇게 감동이 있다. 여러 번 돌려보지 않은 영화도 있지만, 이 영화들을 보고 나왔을 때의 나는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둘째는 잔잔한 메시지에 표현력이 좋은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관련된 영화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너무 외설적이지 않은 몇몇 홍상수 감독의 영화 등이 있다. 내용은 분명 문학 장르로서의 드라마다. 내레이션도 잘 없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들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내용도 누군가의 일상에는 있을 법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건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10부작 이상의 드라마에서는 하기 힘든 수준 높은 연출과 몰입도와 연기력과 간단한 메시지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과 사건과 관계가 특별해진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더 유명해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아이엠러브를 가장 좋아한다. 대학 수업에서 미장센에 관한 설명과 곁들여 처음 알게 된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표현과 장면 자체가 시적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유부녀인 주인공이 젊은 요리사의 요리를 먹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여태 본 무엇보다도 시적인 표현이었다.



셋째는 죽고 죽이는 영화다. 솔직히 이 장르에 있어서는 한국의 영화를 이제 다른 영화가 따라오지 못한다. B급의 연출로 은근슬쩍 얼버무리는 킹스맨 학살 신은 킬빌의 액션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실제로 저렇게 다 죽이는 사건은 그다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뇌가 잊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진짜 같은 피투성이 액션을 연출한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후련했냐처럼 좀비같이 안 죽는 주인공이 아니라, 죽어가면서도 죽이는 아저씨의 원빈, 신세계의 황정민, 아수라의 정우성,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이정재 등을 보면 원래의 다정했던 캐릭터가 잊힐 정도로 공포스럽다. 여태까지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을 쫓는 이정재의 연기다. 추적 중 자신을 방해하는 제3자를 방 한가운데에서 창문까지 계속 칼로 밀고 가다가, 제3자가 벽에 걸리자 칼로 목을 밀어버린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이정재의 눈이 이미 창밖으로 도망간 황정민을 쫓느라 살생을 하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심지어 죽이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식은땀이 난다는 표현이 이해가 갔다.


취향이 잡식이라 돈도 많이 들고 전문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이것저것 좋아하다 보니 볼 것은 참 많아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분명해진 것 같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다 보니 바쁠 때는 못 보고 지나가더라도 한가할 때쯤 개봉해 주는 장르성 강한 영화들이 있어 늘 한가할 때를 기대 속에서 기다릴 수 있다.







2시간은 너무 길다


한 일본의 인터뷰어가 장 뤽 고다르의 엄청난 팬이어서 인터뷰를 하고자 그를 직접 찾아갔다. 간신히 초대받아 작업실에 들어 갔는데 작업에 너무 몰두한 서방의 영화감독에게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첫 질문을 잘 해야겠다는 고심 끝에 꺼낸 한 마디. '당신의 영화는 주로 1시간 반을 넘기지 않는 편인데, 이는 영화에 대한 윤리와 도덕의 발로입니까?' 이에 장 뤽 고다르는 신이 나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인터뷰에 돌입했다고 한다. 다소 멋진 일화로 시작했지만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2시간은 너무 길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영화를 봤지만 기억에 선하게 남는 영화나 5번 이상 본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니까 영화는 영상물의 특성상 휘발성이 높고, 또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2시간을 집중해서 감상해봐야 그다지 효용이 높지 않다.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고 많이 봤었는데도 경험적으로 영화는 말그대로 킬링타임, 시간을 잡아먹는 매체다. 그걸 잘 알고 있어도, 시간이 없음에도 여전히 종종 영화를 본다. 왜 보고 어떤 걸 보는지 생각해본다.


앞서 말한 잔잔한데 표현력이 좋은 영화나 죽고 죽이는 영화는 잘 보지 않게 된 것 같다. 다만 오래전에 언젠가는 다 볼 수 있다는 욕심에 열심히 불법으로 다운 받아뒀던 거장의 고전영화 모음 같은 것을 종종 꺼내 본다. 허우 샤오시엔, 오즈 야스지로, 쿠엔틴 타란티노, 짐 자무쉬 등 장르는 별로 가리지 않고 예전의 나의 욕심을 돌아보는 짓을 반복한다. 확실히 볼 때마다 한방이 있어서 시작하는 데 큰 마음을 먹어야 할뿐 보고 나서는 역시 후회가 없다.


앞서 깨달음을 준다고 말한 영화들은 지금 보니 일상, 루틴, 몰입, 노력에 관한 영화들이다. 이 취향은 회고를 만나 극에 달하여 최근에 만난 영화는 [퍼펙트 데이즈]다. 내가 그런 취향인 것을 주변이 알기 때문에 내가 찾아보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추천을 해 온다. 확실히 전처럼 영화를 자주 보지 않기 때문에 추천받은 영화 위주로 보게 되는데, 인간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퍼펙트 데이즈는 영화 같은 순간이 아닌 일상을 영화로 만들어 일상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은은하게 조명하는 영화로, 패터슨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영화에 감명받는 것은 내가 일상의 소중함을 쉽게 일구지 못하니 그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그들의 노력에 쉽게 감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일상을 일구어 가기에는 일상에 침투해버린 2시간짜리 영화는 너무 길지 않은지! 물론 2시간이 훌쩍 넘는데도 좋은 내용의 영화들도 많지만,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말을 무의식중에 곱씹고 있기에 그 사이 영화를 적게 봐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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