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인생이라는 건축 #03
개인의 개성을 키우기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요?
중학교 때는 교실 뒤 사물함에 앉아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쉬는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던 극한의 중2 INFP였기 때문에 이어폰에 관심이 많았다. 이어폰 시장에 관해 알아가던 중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어폰에는 '뽑기운'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산품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는 동일한 제품 안에서도 괜찮은 녀석과 아닌 녀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이어폰 기종 사이에 그 뽑기운이 심하고 심하지 않은 정도의 차이 또한 존재했다. '드림 이어폰'에 비해 하찮은 용돈을 받고 있었던 내게는 이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기껏 샀는데 가격에 준하는 성능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니! 그렇게 구매를 고민하던 중 한 번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어폰의 세계에는 또 '에이징'이라는 테마가 있었다. '에이징'은 이어폰을 처음 샀을 때 스피커가 첫 사용에 망가지지 않고 더 잘 작동하도록 아주 작은 볼륨에서 아주 큰 볼륨까지 자신이 자주 듣는 음악 장르로 재생해 주는 일을 말한다. 공장에서 나온 같은 이어폰들이 이 과정을 통해 사용자 맞춤형 이어폰으로 재탄생하고 개성을 가지게 된다. 매력적인 것은 '에이징'을 통해 '뽑기운'으로 인한 편차도 어느 정도 개선된다는 점이다. 개성의 교육은 하물며 공산품 기계에도 적용 가능할 정도로 중요하다.
인터넷 유머 짤방 중 AI가 딥러닝을 통해 인간이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세, 가장 그네를 잘 탈 수 있는 자세를 밝혀낸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들은 상당히 기괴하여 인터넷에서 AI로 인해 변화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고 너무 우스꽝스러운 나머지 유머 분야로 넘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 동작이 재밌는 것은 그 동작이 우스꽝스럽다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인데, 이는 원래의 동작이 보기 좋고 더 효율적이라고 우리의 시각이 교육받았던 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만약 정말로 그렇게 달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면, 그렇게 달리는 동작에 더 가깝게 운동할 수 있었을 누군가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기회를 박탈 당한 셈이 된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당연하다고 우아하다고 여기지만(교육받았지만) 실제로는 비효율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디자인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미관상 보기 좋다, 시각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다는 이유로 화려한 간판을 단순하게 바꾸거나 포스터의 색상을 차분한 것으로 바꾸는 등의 디자인 방안들은 개성을 말소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이 비효율적일 때에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어릴 때는 사람마다 색을 다르게 보는 데 다들 똑같은 색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예를 들면 같은 노란색이 어떤 사람에게는 노랗게 보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대상에서 그 색이 보이고, 그 색은 이런 색이라는 사회의 교육과 소통의 결과 그 색이 어떤 식으로 보이든 상관없이 각자의 언어 체계 안에서 그 색이 노란색이라고 합의해 버린 것이다. 즉, 이름은 같은 색이지만 각자 다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냐하면, 사람들마다 색에 관해 느끼는 느낌은 다 다른 것 같은데 어떤 색이 어떤 느낌이라고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실제로도 다른 것들을 보지만 같은 것을 보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패션에 대해 모두가 옷을 잘 입지만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는다고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유행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이해한다. 외국인들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쿨한 감수성'의 기준을 정해두고 그것을 주류로 삼아 그것과 다른 감수성을 용인하기 힘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성적으로 풍부하고 솔직하고 대담한 시도들을 유치하고 오글거리고 쿨하지 못하다고 깎아내린다. 유행이라는 것이 유난히 심하게 작용하는 것 또한 비주류는 '쿨하지 못하다'라는 사회적 공포심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성은 언제나 비주류다. 비주류를 용인하는 태도부터 제대로 교육해야 개성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다
지금에서 돌아보니 위의 글을 썼던 5년쯤 전에도 AI는 지금처럼 보편화되진 않았지만 이슈였나보다. 다만 앞선 글에서는 알고리즘과 AI의 뚝딱거림(?)에 주목했지만 여기선 AI의 사고의 범주가 얼마나 인간의 사고의 범주에 '포함(집합)'되는지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여기서 개성은 AI가 가질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무엇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보자.
Claude가 ChatGPT보다 글을 더 잘 쓴다는 통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AI가 쓰는 시는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딸꾹질'을 주제로 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더 상세한 프롬프트를 줬다면 어떤 수준까지는 그럴 듯한 시를 써 줬겠지만, 우리가 한 두 문장으로 시를 요청했을 때 AI들이 써온 것은 시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그걸 수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시가 형편없는데 다른 건 잘 하면서 시는 왜 이러냐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이랬다. 자신은 시라고 주어진 데이터를 학습해서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재구성하거나 흉내내는 것이지, 시란 본래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나 체득한 것을 바탕으로 인간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일진데, 자신은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축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미 데이터화한 모든 데이터를 학습하고 나서 더이상 학습할 데이터가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AI 입장에서도 역으로 특이점을 맞이할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시를 쓸 수 없는 AI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마 그 다음 단계는 로보틱스가 될 것 같지만, 거기서도 인간 보편만큼만을 감각하는 기술이 나오지 않는 이상 AI가 시를 우리가 감동할 정도로 쓰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어려워보인다.
우리는 왜 AI가 쓴 시나 그 외의 모든 작가 AI의 작품에 감동하지 않는가? 책「일에 마음 없는 일」에서 김지원 기자는 이를 바벨스쿼트에 비유한다. 요는 17개까지는 어찌저찌 해내지만 그 다음 3개는 지옥의 맛인데, PT 선생님은 지금부터의 3개가 진짜라고 말하며 그 3개를 해낼 때가 자신이 글을 쓸 때의 태도와도 같다고. 세상에 무수한 기사가 있고 그걸 쓰는 기자들이 있으며 그건 17개의 바벨스쿼트를 하는 것과 같지만, 자신은 17개만 쓰는 사람으로 끝나고 싶지 않았던 굉장한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바로 3개를 더 하는 과정 자체가 인간이 종족으로서 가진 개성같다고 느꼈다. AI는 17개를 너무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머지 3개를 해야 할 모종의 이유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닿을지 모른다는 감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인간으로서 우쭐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비로소 나를 기준에 두고 상대적으로 '이 시(작품이나 작업)는 엄청나구나.' 하고 생각이나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그것을 작가의 개성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것을 개성처럼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 작가가 여지껏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떠오를 때 비로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도대체 이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기에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었을까'하는 감각만이 나를 진정으로 감동시킨다. 김환기가 초대형화폭에 무수히 그려넣은 작은 동그라미들이 그렇고, 영화 '소울'에서 주인공이 몰입의 순간 영혼이 잠시 떠나는 공간이 생명이 탄생하는 공간과 연결되어있다는 세계관이 그렇고, 팻 메스니나 제이콥 콜리어 같은 음악가들이 한 음정 한 음정 섬세하게 골라 쌓아올린 환상적인 화음들이 그렇다. 나는 도저히 이르지 못할 것 같은 노력의 경지가 느껴질 때 비로소 감동하는 법이다.
그래서 한편 조금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기도 한다. 부디 AI의 기술력과 '진짜같음'이 아니라, AI의 순수 창작물에 내가 진정으로 감동하는 미래가 오지 않기를. 그럴 수 없다는 사고 방식을 뛰어넘는 사고가 진행되지 않기를. 드라마 '삼체'에서 과학의 오랜 믿음이 뒤틀렸을 때 과학자들이 자살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듯,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또 오랜 시간을 허비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